1 8 1 8년, 조선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상에 태어나기 2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일이다.
1 810년대의 런던의 항구는 포화 상태였다. 세계에서 들어오는 모든 교역품이
런던 항으로 드나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부두였으며,
유동량을 제외하고도 수십척의 대형 범선들이 강을 따라 늘어져 선적을 대기중이었다.
그래서 발생한 문제가 있었는데, 뒤쪽의 선박은 하역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런던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짐을 보내는 것보다 오래 걸렸던 것이었다.
다리는 대안이 되지 못했다. 범선들의 돛이 높기 때문에 아래로 문제없이 지나려면
당시 기술의 한계 이상으로 다리가 높아야 했다. 무엇보다 진입로가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빠르게 물자들을 항구에서 운송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의 행정가들이 자문을 구했다.
"템스 강 지하로 370M 길이의 터널을 뚫고, 철로를 놓을 수 있겠는가?"
대다수 건축가, 공학자들이 난색을 표했다.
그 중에는 세계 최초로 증기 기관차를 사용한 당대 유명한 발명가이자, 건축가 리처드 트레비식도 있었다.
트레비식은 영국 최고의 숙련공들인 콘윌 광부들을 데리고, 2년간 1000 피트를 파는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엄청난 강물 아래로 터널을 파는 것은 미친짓이다."
그때, 어느 한 건축가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 최고의 공학자로 꼽히는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의 친아버지.
마크 브루넬 (1769 ~ 1 849)은 말했다.
"템스 강 밑으로 터널을 뚫을 수 있다."
지반이 극도로 약한 템스강 밑으로 터널을 뚫는 것은 당시 건축, 토목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템스강 지반 모형. 흰색 점토층이 터널을 시공 가능한 굴착층이다.
터널을 뚫다가 조금만 침하가 되어도 강물 탓에 통째로 붕괴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강 밑으로 터널을 뚫고 선로를 놓는 방법. 이 난공사를 어떻게 가능케 할 것인가?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마크 브루넬은, 좀조개를 우연히 관찰하고, 힌트를 얻었다.
좀조개는 머리 부분에 딱딱한 톱니 모양의 껍질을 가진 생물로, 목재 부분을 갉아서 파고들어간다.
그런데, 목재는 수분을 만나면 팽창한다. 구멍이 막혀버려 자살과 다름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조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좀조개는 구멍을 파고 들어가면서, 몸에서 채액을 분비해 채액을 굳게 만들면서
변형을 막으면서 이동했던 것이다.
마크 브루넬은 이 좀조개의 특성을 보고 생각했다.
'좀조개의 특성을, 공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1 8 1 8년, 마크 브루넬은 이 기계의 이름을 '쉴드' 라고 붙인다.
36개의 강철틀, 각 틀마다 덧쇠가 끼워져 있다. 나무판들이 불안정한 진흙벽을 지탱해준다.
사람이 타서 틀 하나씩을 제거하고 조금씩 진흙을 판다. 모든 틀에서 진흙을 파고 나면,
잭을 사용해 틀을 앞으로 밀어 전진시킨다. 이 과정에서 지지대와 기계 사이에 틈이 생기는데,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인부들이 곧장 시멘트와 벽돌로 벽을 만들어 틈을 메워버린다.
그렇게, 조금씩 이중 시굴공을 만들면서 전진하는 것이 브루넬이 생각한 방법.
1 825년, 모든 준비사항을 마치고 드디어 템스 터널이 시공되기 시작했다.
기존 공사보다 막대한 양의 임금을 약속받은, 영국 전역에서 거르고 거른 베테랑 숙련공들,
그러나 쉴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기술력으로는 대단한 난공사였다.
환기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템스강 지하의 오염물질들을 그대로 뚫으면서 전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수의 인부들이 교대로 작업해야 했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30여초 만에 통과하는 템스 하저터널은
200년 전, 영국의 인부들이 근 20여년 동안 파고 들어갔던 터널이다.
1 825년 시공, 1 843년 착공된 템스 터널은 오늘날도 유지되고 있다.
당시 템스강 공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영국의 건축, 굴착 기술을 한층 진일보 시켰으며
이 노하우들은 지하철 공사에도 사용되어 1 863년, 영국은 세계 최초로 지하철을 개통하게 된다.
마크 브루넬의 공법은 200년이 지난 현대에도, 쉴드 - TBM 공법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