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당시의 동북아의 정세
성종 치세의 요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1004년 송나라에 쳐들어가서 현재의 하북성을 휩쓸었고
송나라는 "120만 대군을 동원해 요를 정벌하겠다"고 했으나....
순식간에 털리고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구걸하는
굴욕적인 "단연회맹"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고려
이미 두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바 있었지만
세치 혓바닥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
첫번째 침입은 서희의 말빨에 말려 고려 좋은 일만 해주고 왔고
두번째 침입은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쳐들어와
통주 전투에서 강조를 죽이고 개경을 함락시켰지만
양규, 김숙홍등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겨 곤란해진데다
마침 고려가 친조하겠다 약속하자 받아들이고 물러나던 와중에
흥화진, 압록강 등지에서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되죠
당시 기록에는 2차 침입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거란의 귀족출신 장교)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리도 태반이나 전사했다. 이에 유계(幽薊:하북지방) 지방에 영을 내려
일찍이 벼슬을 구하던 자와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하였다.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송나라의 기록
군사를 돌이킴에 항복하였던 여러 성(城)이 다시 고려로 돌아섰다.
귀주(貴州) 남쪽 준령곡(峻嶺谷)에 이르자 큰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쳤다
갑옷과 무기는 대부분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비가 개인 후에야 강을 건너게 되었다
-요사본기(遼史本紀) 성종(成宗) 통화(統和) 29년 정월조 , 요나라의 기록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고려사절요 현종 2년(1011년)
물론 친조약속은 지켜지지도 않았으며
인질로 요나라로 잡아온 대신 하공진은
성종이 배필까지 맺어주며 회유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탈출하려다 잡혀 처형당했습니다.
결국 2차례의 침입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피해만 입은 셈이 되었죠
결국 2차 침입으로 부터 8년후인 1018년
요나라 황제의 친위대인 우피실군(右皮室軍)을 주력으로 하는 10만의 병력을 소집하고
몽골 정벌,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2차 고요전쟁에도 참전하여 고려군을 격파한 적이 있는
선왕의 부마이자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 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경유수 야율팔가, 객성사 작고를 비롯하여 여러 장군들을 소집하여
고려 침공을 명령합니다
금의 공격으로 망한후 서쪽으로 이주해 새로 건국한 서요(카라키타이) 병사와 장교의 모습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군 역시 거란, 몽골, 여진, 발해, 그외의 서역의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을 테니
귀주대첩 시기의 요나라군도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배압은 2차 침입 당시 고려에 이미 한번 왔던 적이 있었고
당시처럼 성 하나하나 함락시키고 가면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전략이 바로 "전격전"
고려군이 모일 시간을 주지 않고 중간의 성들과 도시들을 피해
개경으로 무조건 직진해서
왕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사로잡아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요나라군 10만 모두가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또한 이 작전은 훗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써먹었던 작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달랐지만...)
하지만 고려측은 이미 왕래하던 상인들을 통해 요나라의 침공소식을 알고 있었고
미리 준비를 해두고 있었죠
고려시대의 갑옷 유물과 복원품
요나라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은 부원수 강민첨에게 12,000의 병력을 줘서 보냈고
강민첨은 압록강의 지류인 삼교천의 물을 막고 흥화진에 매복합니다
요나라군의 선두에 섰던 원심탄자군(遠探攔子軍)과
타초곡기(打草谷騎) 를 주축으로 하는 부대가 먼저 삼교천을 건너고
뒤이어 후속 주력 부대들이 뒤이어 강을 건너려 하자
강민첨은 상류에서 막아 놓았던 강물을 터뜨립니다.
급류가 몰아쳐와 후속 부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먼저 강을 건넌 원심탄자군과 타초곡기에게
매복하고 있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수공(水攻)은 흔히 알고 있는 강물로 적을 쓸어버리는게 아니라
실제로는 강을 건너는 적의 군대를 둘로 나눠서 각개격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강물만 가지고 적을 다 쓸어버리는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원심탄자군과 타초곡기는
뒤는 급류가 몰아치는 강물에 막히고 앞은 고려군에게 포위당했는데
애초에 정찰과 수색, 약탈, 보급을 담당하기 때문에
무장이 빈약하던 그들은 순식간에 궤멸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군은 그들이 전멸당하는 동안
강건너에서 발만 동동거리며 보고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흥화진 전투"에서 요나라군의 정찰과 보급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부대들이 전멸당했고
그리하여 전문적인 정찰병력이 부족해진 요나라군은
이후 고려군의 매복공격과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은 소배압의 진정한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죠
보통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통로는 2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의주-흥화진-통주-곽주-안복부-숙주-서경-평주-개경으로 이어지는 남로(南路)
의주-흥화진-천마-귀주-태주-개주-순천-수안-평주-개경으로 이어지는 북로(北路)
였습니다
남로는 해안을 따라 난 통로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며
북로는 내륙을 통한 길로 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통로였지요
일반적으로 고려에 쳐들어온 적들은 대부분 남로를 택했고
몇년전 있었던 2차 고요전쟁에서의 요나라군 역시 남로를 통해 남하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요나라군이 남로를 통해 올 것이라 예상한 고려군은
남로에 속한 영주(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습니다만
뜻밖에도 소배압이 택한 통로는 북로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군은 북로를 통해 빠르게 남하하여
남로에 집결하고 있던 고려군 주력을 피해 고려군의 등뒤로 돌아와버렸죠
생각지 못한 요나라군의 움직임에 허를 찔린 강감찬은 급히 명령을 내립니다.
"부원수 강민첨은 1만 4천의 기병을 줄테니 즉시 거란군을 추격하여 요격하라"
"병마판관 김종현은 1만의 철기(鐵騎)를 줄테니 전력을 다해 개경으로 달려 방어하라"
"동북면에서 오고 있는 지원군 3300명은 즉시 개경성으로 향하여 방어군에 합류하라"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남로와 북로의 교차점으로 남하하며 재집결한다"
고려군의 주력부대를 따돌리는데 성공한 소배압은 쾌재를 올리며 개경으로 달렸습니다.
이제 승부는 김종현과 동북방면 고려군이 개경에 먼저 당도하느냐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에 먼저 당도하느냐의 시간과의 싸움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보물 제588호 강민첨 초상화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최대 속도로 남하하여 요나라군을 후미를 따라잡는데 성공했고
개경으로 남하하는 요나라군의 엉덩이를 계속 찔러댓습니다
특히 자주 내구산 전투에서는 요나라군 부대 하나를 따라잡아 공격하여 궤멸시키기도 했지요
하지만 요나라군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찔리면서도 앞만 보면서 달렸습니다.
피해가 좀 나더라도 고려왕을 잡으면 충분히 만회가 된다는 일념이었지요
요나라군에게 다른 성들은 안중에 없으며 목표는 개경성뿐이라는걸 알게된 고려군은
자신들이 지키던 성에서 뛰쳐나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대동강을 건너려는 요나라군을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서경 동쪽의 마탄(馬灘)에서 습격하여
1만이나 되는 요나라군을 격멸하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죠
참고로 마탄(馬灘, 말여울) 이라는 지명이 생긴 이유가 바로 이 전투였습니다
수많은 죽은 말들이 떠내려와 산처럼 쌓여서 마탄 이라고 불리우게 됬지요
김종현군은 남로의 최단경로를 전속으로 달려 결국 요나라군을 따라잡는데 성공한다
1019년 1월 3일
요나라군은 드디어 개경에서 40km거리의 신은현(현재의 신계)에 도달합니다
이 소식은 즉시 개경에 알려졌고
고려왕 현종은 성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대피시킨후
성밖의 식량과 건초등을 치워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개경을 사수하겠다는 의지였지요
얼마 지나지않아 요나라군의 선발대 300여명이 개경의 통덕문에 도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요나라로 되돌아 간다고 알려주고 사라지는데
이건 고려측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었고
이에 현종은 결사대 100여명을 보내어 금교역에서 이들을 습격하여 전멸시킵니다.
아직 고려측의 지원군이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겠죠
전성기 개경은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김종현의 부대가 개경에 도달했고
고려의 지원군이 개경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소배압은 개경을 함락시키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을 결심합니다
요나라군이 퇴각하자 김종현은 자신이 지휘하는 철기 1만을 이끌고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합니다
강민첨에 이어 김종현의 군대까지 요나라군의 뒤에 따라붙기 시작하자
요나라군은 그들을 따돌리려 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해서 각자 다른 루트를 통해 추격하던
김종현과 강민첨과의 거리를 조금은 벌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 본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로에서 북로로 진입한 고려군 본대는 순안과 개천에서 요나라군의 소규모 부대를 만나 격파했고
요나라군 본대가 자신들의 주변 어딘가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라군이 강민첨과 김종현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영변, 박천, 대천, 귀주방면으로 기동하는 사이
고려군 본대는 즉시 귀주로 향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건 요나라로 가기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19년 2월1일(양력 3월 1일)
자신들이 온 북로를 따라 태주에서 귀주방면으로 퇴각하던 요나라군 10만 앞에
거의 20만에 달하는 고려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만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귀주였기에
결전을 피할수 없다는 판단하에 요나라군은 전투 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장수들의 의견은 갈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장수들의 의견은 신중을 기하자였습니다
그냥 다하(茶河)와 타하(蛇河)를 고려군과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있다가
고려군이 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가장 유리합니다.
하지만 동경유수 야율팔가의 의견은 달랐죠
적이 강을 건너온 후에 싸우면 적은 배수진을 친 형세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니 그건 도리어 위험한 계책입니다
지금 위치에서 물러나 다하와 타하 사이로 적을 유인한 후 공격하는게 현명하다 생각합니다
이 의견을 들은 소배압은 야율팔가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현재의 보급상황으로는 최대한 빠른 결전이 필요하다
또한 이번 원정에 황제폐하의 오른팔인 우피실군까지 데리고 왔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책임추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양군의 대략적인 초기 배치도
파란색은 고려군, 붉은색은 요나라군
양군은 강을 끼고 전투를 개시합니다
요나라군은 재빨리 고지대를 선점하고
강물 때문에 숫적인 이점을 살리기 힘든 진영배치를 하게된 고려군을 압박하려 하였으나
고려군은 착실하게 검차를 앞세워 요나라군의 맹공을 막아냈으며
양군은 서로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습하며
며칠에 걸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려군은 장기의 차, 포와 같은 주력부대인 김종현과 강민첨의 기병대가 없는 상황
요나라군은 보급이 쪼달려 최대한 빨리 결착을 내야하는 상황
둘다 초조하긴 마찮가지였죠
그렇게 며칠간을 계속하여 싸우던 도중
갑작스럽게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는데
그런 비를 맞으면서도 양군은 피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때...
병마판관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기병대가 요나라군의 좌익을 강타
요나라군의 왼쪽에 정주방면에서 요나라군을 추격해온 김종현의 기병대 1만이 나타납니다
김종현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고려와 요나라군의 전투를 보고
즉시 요나라군의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자신이 지휘하는 1만의 기병대에게 돌격을 명령합니다
귀주대첩을 그린 민족 기록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격돌하는 고려와 요나라 기병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때 지금까지 고려군쪽으로 빗방울을 날리며 불리하게 작용하던 바람의 방향이
극적으로 요나라군 쪽으로 바뀌며 요나라군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김종현의 철기 1만은 바람을 등지고 달려 요나라군의 옆구리를 강타
요나라군의 좌익은 갑작스런 김종현군의 습격에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곧이어 나타난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1만 4천의 기병대가 요나라군의 후방을 강타
아직 요나라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태주방면에서 요나라군을 추격해온
부원수 강민첨의 기병대 1만 4천이 요나라군 후방의 언덕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강민첨 역시 즉시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고
언덕위에서 쏟아져 내려온 1만 4천의 고려 기병대에 요나라군은 다시 한번 강타 당했으며
요나라군은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중 펠렌노르 평원전투에 나오는 로한 기병대의 숫자가 겨우(?) 6천
하지만 귀주대첩 당시에는 1만 + 1만 4천의 고려군 기병대가 차례로 요나라군 진영에 돌격을 감행하는
영화를 능가하는 ㅎㄷㄷ한 스케일을 보여줬다..
고려군 기병대의 돌격을 직격으로 맞은 요나라군 부대들은 그대로 궤멸당해 버렸는데
요나라 황제의 친위대이자 최정예부대이던 우피실군(右皮室軍)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천운군(天雲軍) 격멸, 천운상온(군지휘관) 해리(海里) 전사
요련군(遙輦軍) 격멸, 요련장상온 아과달(阿果達) 전사
발해군(渤海軍) 격멸,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전사
이외에도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역시 전사합니다
특히 거란어로 피실은 "금강(金剛)"
즉 피실군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단단함을 자랑하는 요나라 황제의 최정예 친위대였는데
귀주에서 소멸됩니다
우피실군은 2차 고요전쟁 당시 통주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강조를 잡아죽인 부대였는데
귀주대첩에서 전멸함으로서 통주전투의 복수를 톡톡히 한 셈이 되었죠
포위섬멸 당하는 와중에도
요나라군은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기 위해 싸웠고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인 해족(奚族)으로 이루어진 효리군(肴里軍), 열가군(湼哥軍) 양군과
피실군, 발해군의 잔존 병사들은 살아남은 지휘관들의 지휘하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본대와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대의 포위망 경계부분에 틈을 발견하고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포위망을 뚫고 1만 이상의 생존 병력이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뒤를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대가 다시 따라 붙었으며
10km에 걸친 추격전 끝에 따라잡힌 요나라 패잔병들은
반령 고개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다 궤멸됩니다
귀주에서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요나라군은 10명중 한명도 안되는 대승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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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본기 16권 성종 개태 7년(1018년) 정유
개태 7년 12월 정유,
소배압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사이에서 고려와 전투를 벌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아
천운,우피실 2군에서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은이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 아과달, 객성사 작고, 발해상온 고청명, 천운군상온 해리 등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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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사가 승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했다.
용기가 스스로 배가되었다.
거란의 병사들은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렀는데,
적군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고 포로로 잡은 인원과 뺏은 말과 낙타, 갑옷, 투구, 병장기 등이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여 명이었다.
거란이 지금까지 이토록 무참한 패배를 당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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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에 걸친 요나라(거란)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이 전투가 끝나고
고려군이 포로들을 데리고 개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나가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라는 으마으마한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강감찬조차 감당할수가 없다며 사의를 표명할 정도였죠
이에 비해 무기고 갑옷이고 부하들이고 다 버리고 겨우 도망치는데 성공한 소배압을 만난 요나라 성종은
"니놈의 얼굴가죽을 벗겨 죽여버리겠다" 며 펄펄 뛰었지만
선왕의 부마(국구)인 그를 죽일수는 없었고 폐서인 시켜 내쫒아 버렸습니다
훗날 유왕(幽王)의 직위에 복귀하긴 하지만 더이상 활약은 못한체 그냥 조용히 지내야만 했지요
그렇게 동북아시아는 송, 고려, 요의 삼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시대가 옵니다
송은 요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고려와 연합으로 양면전선을 구축해야만 했고
요는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방의 고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이중 가장 득만 있고 실이 없던 곳이 바로 고려였습니다..
요나 송은 고려의 협력이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전투의 승리로 상승한 "국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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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사신이 [고려高麗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 송사 외국전 고려
송나라 사신이 오면 별별 핑계로 와서 삥뜯어갔다는 기록...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오면 뇌물준다고 허리가 휘었던 걸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기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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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송(宋)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다
-소식(동파) 묘지(墓誌)
고려사신은 송나라 지방관들을 능멸하고...
고려사신을 안내하는 중국관리까지 고려사신빽으로 행패를 부립니다
하지만 혐한의 원조인 소동파도 차마 고려사신한테 직접 뭐라고는 못하고
중국관리들만 조집니다
고려사신은 공시걱인 문서에 송나라 연호도 안쓰고...
그냥 갑자로 쓰는 대찬 모습을 보이는데(병신년, 갑자월 일 이런식으로..)
결국 참다참다 빡친 소동파가 지랄하니까 마지못해 송나라 연호를 써주죠
참고로 소동파는 조국인 송나라를 삥뜯는 고려에 격분해서
고려금수론, 고려해악론 등을 집필하며
고려인은 짐승과 같고
고려는 송나라에 좀같은 존재이니 어서 단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조 혐한의 진면목을 보였지만 도리어 비웃음만 당하고
고려왕자출신의 승려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왔을때
그의 관광가이드를 맡아 명승지나 안내하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고구려를 흔히 한민족 최고의 전성기로 꼽기도 하지만
진정한 전성기는 이때죠...
1세기 가까이 동북아시아의 양대대국이던 송과 요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두 대국을 흔들던 시기였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