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스승인 세종대의 일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의도는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억지로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고,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 거머리같은 새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장경을 청구하였으며, 세종은 대장경판을 넘겨 주려고 하기도 했으나 대신들의 항의로 철회된 후 그러한 방침을 고수하셨다 한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쫓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ㅡ 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25일(임신년) 1번째 기사.
경판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요구한다고 하여 주었다가 나중에 일본 측에서 주어선 안될 물건까지 요구할 것을 경계했다는 이야기이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 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ㅡ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 2년) 4월 28일(정해) 3번째기사
덧붙여 세종은 한양으로 옮겨 보관할까 했지만 비용 문제든 여러가지 문제가 걸려 흐지부지 되었다.
팔만대장경 경판
전해 내려오는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일본 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시시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 경판의 인경본을 받아 갔다고 한다. 류쿠에서는 여러번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가다가 아예 원판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해서 인경본을 받아갔고,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에 보관하였다 한다. 하지만 1609년 사츠마번의 침공 당시 소실되고 만다.
인쇄본으로 만족하지 못한 저렇게 생긴 일본애들은 팔만대장경을 노리고 별생지 랄을 다 저질렀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하여 달라고 하는짓까지 벌였다. 1484년 이천도국이라는 별 희한한 이름의 가짜 나라 사신을 내세워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고, 1741년에는 구변국이라는 역시나 가짜 나라를 내세워 같은 짓을 하려다가 거부당했다고 한다. 이도 저도 안되니 결국에는 해인사로 무장군대를 보내 약탈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 무려 80여회나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해인사
일제 강점기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노렸는데, 해인사 승려들이 차라리 장경을 불태워 같이 타 죽겠다고 하며 죽을 각오로 막았기에 일본도 번번이 반출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 승려는 칼을 가져와 자해하면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매천야록'에서 황현도 대한제국 말부터 왜놈들이 대장경을 그렇게 노린다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현재까지 남아있는게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