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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이형님은 워낙 자서전으로도 알려져있고해서 간추려서

 

수원산남초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권유에 축구를 시작했지만

1년 만에 팀이 해체됐고,

당시 코치가 박지성을 인근 세류초등학교로 전학시켜 축구를 할 수 있게 도와줬음. 

 

이때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 씨가 크게 반대했지만

얼마전 안타깝게 돌아가신 어머니 장명자 씨가 끝까지 설득해 축구화를 계속 신을 수 있었음

정육점을 운영하는등 부모님이 결심한 박지성을 뒷바라지해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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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버지가 다닌 세류초는 통학시간이 30분이나 되었는데

6개월간 초등학생이 이거리를 매일 다니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함.

그러나 그기간이 지난후 기숙사에 들어갈수있었고 축구에 매진함

당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전술이해도를 타고나게한 박지성의 축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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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류초는 축구명문학교긴했으나 우승과는 거리가멀었는데

박지성이 7번을 달고 팀의중심이된 6학년때 금석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6학년때 한국의 발터상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함

이후 안용중학교에 진학하는데 공교롭게도 안용중이 차붐이 잠깐 다녔던곳이기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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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중 시절 해버지

 

잠깐 겨울에 진학하기로한 중학교에서 훈련을하다 구타를당하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안용중으로 박성종씨는 진학을 시키기로한다

당시 안용중은 전국대회기록도 없는 학교였는데 해버지 입성이후 대회들을 우승하며 상위권으로 도약함

 

천재급의 축구센스와 지능 이해도에비해 신체가 발달하지못해서 중학교 이후론 애를먹기도했고

여러 지도자들사이에서도 저평가당함

 

딱히 우리나라만의 문제는아닌게 독일도 로이스 돌문유스때 체구때문에

아헨으로 방출되서 간적있을정도로 축구계가 체격도 중요하게 보지

그 메시조차도 키때문에 고민좀했으니까

 

당시는 진학이 에이스 한명에 팀원 몇명해서 진학시키는 구조여서

안용중 에이스던 김학성이란 유스선수를 따라 부천 정명고로 가는게 확정적이었으나

박지성의 재능을 알아본 이학종감독이 박성종씨와 이야기나눈끝에 수원공고로 가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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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 수원공고 감독은 "박지성에게 1학년 때까지는 공을 가지고 노는 수준의 가벼운 훈련 정도만 시켰다"고 함.

심한 훈련이 성장에 장애가 될까봐서였다고.

이 감독은 "충분히 쉬고 많이 먹게 하려는 배려 차원에서 집에 자주 보냈더니

박지성의 아버지가 '축구를 그만두게 하려는 게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왔을 정도라고.

 

박지성의 왜소한 체격때문에 부모님도 혼신을 다하셨는데

개구리잡아다 먹이기도했고 온갖 민간약재나 성장에 좋은건 다 들이심

 

다행히 성장이 어느정도 되었고 170 근접까지 자랐다고함. (현재 해버지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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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생활 사나이였던 해버지의 생활기록부. 특이하게 건설재료기능사자격증이있다 

 

담임선생님의 인터뷰로는 축구선수로 안풀리면

자격증이라도 있어야하지않냐는 소리에 짬짬이 시간내서 땄다고함

더불어서 나는 성공할수있다고 항상 되내이며 다녔다고

 

박지성의 수원공고는 3학년인 98년 (박지성은 빠른 81이라 80년생과 친구) 전국체전에 우승하고

대통령배 3위, 추계연맹전 3위, 백운기 2위를 기록 성과를냄

졸업이 다가오고 프로진출이나 진학을 해야했으나 당시는 프로직행이 거의없던 시절이었고

수원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탈락함

(수원공고가 수원지원을 받았으나 당시 k리그 최강이던 수원으로 가는건 별따기.)

 

해버지의 왜소한 체격때문에 저평가당하고 명문대들로부터도 퇴짜를 많이맞음

이때의 해버지고민은 자서전에도 더 자세히나옴. 치킨집,체육교사 이러던시절..

 

다행히 이학종 감독의 추천과 재능을 알아본 명지대 김희태감독에게 자리가 나서 명지대로 진학함.

김희태 당시 명지대 감독은 "처음에 입학했을때는 정말 유소년이나 다름없었다"며

"하지만 경기를 치를 수록 발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력이 좋고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했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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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대학 1학년 때인 99년 3월,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끌고 있던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함.

한달 전 박지성이 명지대시절 올림픽대표팀과의 몇 차례 연습경기에서 좋은활약을 보였고

박지성을 본 허카우터 허정무감독은 이xx다 싶었음.

김희태 감독에게 연락했고 김감독은 허정무 감독에게 그의 발탁을 권함.

그래서 기술위원회도 거치지않고 권한으로 발탁후 1주일간 테스트했는데 이xx는 진짜배기다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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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올림픽 예선과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 다수 출전시키면서 수미와 윙백을 오가면서

박지성은 자신의 진가를 입증함.

동시에 신체가 어느정도 올라오고 기량이 급성장했고

 

2000년 4월 국대감독을 겸임하던 허정무감독에의해 아시안컵예선에서 데뷔하고 라오스전에 출전하며

국가대표팀에 데뷔함. 6월엔 만19세에 당시 유고슬라비아국대를 상대로 a매치 데뷔골을 넣고

여름에 시드니올림픽 본선에 선발로 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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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 19세의 선수가 국대와 올대를 오가자 j리그클럽들이 박지성에 눈독들이게되고

시미즈와 협상에 들어가나 결렬됨.

교토와 협상했고 연봉 5천만엔의 특급계약으로 프로에 입단하게된다.

당시 최고스타 홍명보가 7천만엔, 윤정환이 4천5백만엔.

 

특이하게 청대경력보다 올대와 국대에 먼저데뷔한케이스

오히려 이천수와 같이한 u20은 2000년에 아시아예선에서 떨어졌음.

감독이 안좋아서 그랬지만.

 

이후에 아시안컵본선에도 출전하고 교토의 주전으로 활약하고 히딩크감독이 온후 황태자로

 

 

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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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대구 반야월초교 운동장.

학급대항축구대회 4학년 경기 심판을 보던 시덕준 축구부 감독은 한 꼬마를 주목한다.

"수비수 두 명을 제끼더니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스피드 뿐만 아니라 탄력까지 좋았다.

축구부원도 아닌, 초등생의 재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고함.

 

박주영은 반에서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이 운동시킬생각이 없었다고하는데

시감독의 구애끝에 결국 부모님을 축구를 허락하게됨

 

4학년이던 박주영은 형들을 제치고 축구부 주전에들고 매경기마다 멀티골을 넣으면서 남다른 재능을 자랑함

 

박주영이 중학교당시 청구고감독이던 박경훈감독은 박주영에 회상에대해.

"무엇보다 개인기가 뛰어났죠. 슈팅도 남들보다 반박자 빠른데다 순간 동작이 남달랐어요.

머리를 쓰는 플레이에다 빠르니 상대팀 골키퍼들이 예측을 잘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쨌든 중학교 때부터 더욱 기량이 만개했죠." 라고 말했다

 

중학교무대에서 남달랐던 박주영은 2001년 포항의 청구고지원하에 지쿠풋볼센터로 축구유학을 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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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고3이된 박주영은 고교무대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는데

2003년 금강대기 12골, 문광부장관기 9골, 대통령금배 6골, 가을철중고연맹전 12골 득점왕을 먹으면서

국내 축구계 인사들을 자기에게 주목시키게되며

이후 청구고를 졸업한 박주영은 고려대로 진학하게된다.

 

아시안컵전 국가대표팀에도 불려가게되나 본프레레에게 훅 불면 날아갈거같다는 인터뷰를 듣던게 고려대1학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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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주영은 자기를 각인시킨 u19 아시아챔피언쉽에서 득점왕과 mvp를 차지하며 국내축구팬들을 술렁이게하고

2005년 카타르 친선대회에서 역시 득점왕과 우승을 차지하면서

당시 한일월드컵이후 유망주에 목말라있던 매스컴을타고 다큐까지 제작되는등 신드롬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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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은 대학교를 휴학하고 2005년 FC서울에 입단하게된다.

유학비용과 청구고지원을했던 포항이 우선협상권이있었는데 서울로가버려서 논란이일기도했었다.

뭐 자세한건 다른쪽에서..

 

이후 박주영은 서울에 입단하고 구름관중을 몰고다니면서 득점2위와 신인상을 수상한다.

또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여 최종예선 막판 2골로 월드컵진출에 기여하게된다.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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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만수북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이근호는 이듬해 전국 무대에서 두각을 보였다.

당시 나이키컵 초등부 우승에 mvp 등 3관왕을 하고 김남일등을 배출한 부평동중으로 진학하게된다.

 

어머니 남심씨는 “근호가 조기축구회에서 아저씨들하고 공을 찬 적이 있는데 ‘정말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난 다른 어머니와 다르게 아들이 운동하는 것을 찬성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인천지역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소개해달라고 했고

만수북초에서 시작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인터뷰를보면 당시도 박지성처럼 체벌을 당하면서 시작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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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동중시절.

 

이근호는 중·고등학교 시절 최전방 공격수로 전국 대회에서 이름을 떨치며 특급 유망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동창인 하대성 과 함께 부평동중의 전성기를열고 축구명문 부평고로 진학해 그곳에서도 전성기를 열었다.

2003년에는 전국대회 3관왕까지 이뤄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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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입단전 2003년의 이근호)

백운기 MVP수상후 이근호.

본인말로는 어렸을때이후 공격포지션외의 포지션에선 뛰어본적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구고 박주영 과함께 고교 최고스타던 이근호는 2003년 말까지 청소년대표팀 경력이 없었는데

u17보다 나이가많고 u19보다 좀어린 끼인세대다보니 들어가지못했다.

2003년말과 인천입단후인 2004년에 콜업되고 경기도뛰나 u19.u20 본선무대는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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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고등학교졸업후 2004년에 이근호는 지역프로팀이던 인천유나이티드에 기대를 받으며 입단하지만

당시 라돈치치 등이 버티던 인천공격진에 밀려 R리그의 2군무대에서 뛰게된다.

 

2년가까이 1군무대에서 정규리그 데뷔는 못한채 컵대회등에 7경기에 불과했지만

2006년 이근호는 R리그 20경기 7골 7도움으로 MVP에 오르게되고

이를 지켜본 대구FC가 접근해 윤주일과 트레이드되어 대구에 입단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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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시즌 대구로 이적한 이근호는 두번째경기에 멀티골 울산을 상대로

드리블 돌파골을 넣으며 시즌 10골 3도움을 기록하게되고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에 출전 골을기록하며 아시안컵 국가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된다.

이후는 2008시즌 13골 6도움을 기록하고 허정무호 국가대표팀에 부름받아

최종예선 공격선봉에서면서 이름을 알리게됨.

 

 

이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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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난 이청용은 초5때까지 평범하게 학교다니는 일반 학생이었음.

당시 월천초에 다니는 이청용은 그냥 운동장에서 평범하게 공이나 차고 놀고 있었는데

김용운 당시 창동초 감독이 돌아다니던중

저놈은 뭐지 싶어서 계속봤던게 축구에 입문한 계기가 됨.

 

“빠른 스피드에 안정적인 드리블 자세가 돋보였다.

축구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고 맨땅에서 공을 차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운 아이들 못지않아 한눈에 들어왔다”고 회상했음. 김감독은 이청용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축구 배워보지 않을래?” 아이는 수줍게 대답했다고함.

“몰라요. 아버지한테 여쭤보고요.” 라고 말했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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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감독은 이청용의 아버지 이장근씨를 계속 설득하려고 하루가멀다하고 월천초로 찾아갔다고함.

이장근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선수여서 운동부의 힘듦을 잘알았고

공부를 곧잘하던 이청용을 운동시키지 않으려고했으나 설득에 축구를 시키기로함.

이청용은 창동초를 졸업하고나서 도봉중에 입학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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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중시절 이청용은 스트라이커로 뛰게된다.

 

당시 도봉중 이찬행 감독에따르면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빠른 스피드, 축구에 대한 센스는 이미 또래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흐름을 알고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했다.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을 제치고 경기에 나서더니 2학년 때 기량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

결승전에서 혼자 세네 골을 몰아 넣으며 팀을 우승시킨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다고 한다.

 

무엇보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아는 응용력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드리블하다가 공격방향을 전환하는 동작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공을 앞에 두고 오른발로 접는 동작을 연습시켰는데 바로 뒤 연습 경기에서

공을 뒤에 두고 발뒤꿈치로 접는 응용 동작까지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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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중 3학년때 서울시장기에 우승하자 추천을 받아 u15대표팀 상비군에 들어가게된다.

 

이무렵 이청용에게도 인생의 결정의시기가 찾아온다.

당시 안양LG감독이던 조광래감독이 도봉중 3학년이던 이청용에 반해 프로입단 제의를해온것.

우리나라는 프로유스도 고교지정제라 사실상 학원축구의 변형형태고 프로유스가 없던 이시절에는

중퇴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식으로 중학교나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갔어야했음

(중학교 의무교육 아니던시절)

 

도봉중 이찬행 감독은 3년안에 두각을 못나타내면 관둘정도로 열심히하라면서

프로행을 일찍 하는게 낫겠다싶어 프로행으로 조언했고

이청용은 중학교를중퇴하고 안양LG 로 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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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학교에서 바로온 선수에게 한동안 기회는없었고 R리그 (리저브리그) 2군 시절을 보내야했음.

2004년에 입단후 당시 R리그에 이청용처럼 중퇴후 프로로간 고명진 고요한등과

R리그에서 뛰면서점 프로무대에 적응해나갔다

 

U-16 대표팀 시절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친 이청용이지만'

프로 무대에 들어선 이후 윙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꾀하게 됐다.

공격수 포지션이 과포화 상태였던 서울이었기에 재능이 많은 이청용을 오른쪽 윙백으로 돌린 것.

 

이청용의 인터뷰에따르면 “예전에 네덜란드에 전지훈련을 갔는데' 그 때 측면 볼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김귀화 코치님께서 저보고 윙백을 한번 보라고 그러셨는데

' 괜찮게 보셨나 봐요. 한국에 돌아와서 ‘이제는 스트라이커로 올려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윙백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공격수가 주목받는 자리이고' 윙백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니까 아쉬운 마음이 있었죠.

아마 제 생각으로는 신체조건이 아주 좋은 편이 아니고' 수비수와 많이 부딪치는 과정에서

조금 약하다는 판단을 내리신 것 같아요.

그런 점을 좀 더 보완했더라면 공격수를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은 갖고 있어요.” 라며

측면으로의 보직변경을 회상했다

 

이시기 룸메이트던 정조국에게 이청용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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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은 2006년 3월 2005년 취임한 이장수감독에의해 프로 데뷔전을 갖는데

옐로카드를받고 좋지않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그다음 전북전나선다

그러나 이청용은 오랜 기간 1군 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훈련 도중 발등 부상을 당해 2개월 정도 쉬었고' 그로 인해 몸 상태도 상당히 좋지 않았었던 것.

경기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선수층이 두터운 서울에서 출장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후 이청용은 7월 22일과 29일 열렸던 삼성 하우젠컵 2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다시 R리그로 내려가기된다. 이때 1어시만을하고 4경기 출전으로 마무리.

 

이시기에 2006년 기성용이 서울로 입단해오고 둘은 R리그(2군리그) 에서 듀오로 활약하면서

조별리그 우승을 차지하게된다. 이때 R리그 전체 우승은 인천이었고 mvp가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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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서 이시기 기성용 박주호 신영록 이상호 송진형등과함께

2006 u19대회에서 공격첨병으로 3위에오르고 월드컵티켓을따내게된다

이시기 조동현감독밑에서 이청용은 다양한 포지션으로 실험되는데 인터뷰에따르면 스위퍼도 본적이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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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귀네슈감독이 서울감독으로 부임해온뒤

귀네슈감독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팀을 만들기위해 새로운 선수를 찾기시작했고

과감하게 R리그에서 폼을 끌어올린 이청용을 1군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출장시키기에 이른다.

 

결과는 시즌 23경기 3골 6어시 더불어서 리그컵 준우승에 일조하게되면서 수위급 윙어로 떠오르게된다.

이후 2007년 캐나다 u20월드컵에나가 브라질,폴란드,미국과 좋은 경기력으로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게되며 다음시즌에 k리그 베스트11과 국가대표팀 데뷔를 하게된다

 

 

기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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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은 아버지 기영옥 (현 광주fc단장)의 가르침속에서 자란 전형적인 축구집안 출신이었음.

기영옥 단장은 금호고시절 윤정환과 고종수를 길러내기도 한사람.

 

기단장은 테이프를 사다주고 운동여건을 마련해주고 소질이있으면 축구선수를 시키려했다고함.

초딩저학년때 중학생들과 경기를 시켰는데 프리킥득점하는걸보고 킥에 감각이있는걸알고

축구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한다

그러나 킥 감각은 뛰어났지만 기본기가없는 초보였기에 순천중앙초의 정한균감독에게 맡기고 육성을 시켰음.

 

기성용이 4학년때 기영옥단장은 기성용을 보러왔다가 실망하고

이렇게하면 축구포기시키고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말했다고함

그러나 정감독은 기영옥단장을 설득해서 1년간 특훈을 통해 파워와 기본기가 향상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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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생인 기성용은 2000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최우수선수상도 거머쥐었다.

2001년에는 차범근 축구대상까지 차지하며 전국구의 유망주로 이름을 알렸음

 

2001년 광양제철중 1학년때 기단장은 기성용을 호주로 유학보내는데

축구외에도 영어를 배워 먹고살길을 마련해주기위해 유학을 보냈음

 

기단장은 기성용을 83 청대 4강맴버기도했던 김판근씨의 집에 보냈고

거기서 숙식하며 호주에서의 유학생활을 이어나감.

 

당시 호주에서 김판근씨가 만든 아카데미에서 현재 제주 센터백 오반석과

중국에서뛰는 김주영등과 함께 학교후 방과후에 클럽생활을 보내면서 축구를 익히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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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간동안 기성용은 2004년 u16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어 처음 파주nfc에 입성하고 afc대회에 서브선수로 출전함 

유학에서 돌아온 기성용은 2005년말 프로입단을 준비하게되는데

이때 나고야, 빗셀고베,수원삼성,fc서울등으로 테스트를 보러다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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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으로 갈뻔했던 기성용)

 

일본에서 좋은반응이나오나 기성용은 테스트를 더 보러감

당시 차범근감독이있던 수원에 테스트를받으나 국내 고교무대에서 뛰지않았고

호주에서의 교육에대해 미심쩍어했던터라 수원은 계약하지않고

서울로 마지막테스트를 보러가게되는데 서울이 호의적으로 나오게되고 서울과 계약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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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한 이청용과 마찬가지로 프로첫해에 기성용의 자리는없었고

간간히 프로콜업이되던 이청용과 달리 기성용은 1군무대 출장이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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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네슈감독이 부임한후 이청용과함께 기성용을 1군으로 콜업하고

시즌 25경기에 나서는등 팀의 로테이션급 선수로 많은 기회를 부여한다.

리그컵에 6경기가량 나오면서 리그컵우승에일조

이후엔  브라질,폴란드,미국과 좋은 경기력으로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게되며

2008시즌엔 주전으로 자리잡고 리그 베스트 11과 국가대표팀에 데뷔까지하게된다.

이후는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주전먹고 유럽진출하고 아는대로

 

 

구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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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의 아버지 구광희씨는 24년간 공군 주력기 F-16 정비사로 복무하다 2002년 의가사 제대했음.

구자철의 형은 군인이고 그덕에 구자철이 국가유공자혜택을 볼수있었다고함

 

구자철은 충주 중앙초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음.

처음엔 공격수로 시작했지만 수비라인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구광회 씨는 "자철이는 3가지 약속을 했다.

'축구화를 신었으면 죽을 때까지 벗지마라, 숙소 이탈은 금지다, 학교 공부는 반 15등 안에 들어라'였다"며

"마지막 약속만 못 지켰지만, 유럽 진출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꾸준히 했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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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대성중학교에 진학해서는 2년 동안 미드필더로 뛰었고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미드필더와 최종 수비수를 번갈아 소화했던 경험은 구자철에게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필드 플레이어 중 가장 뒤에 처진 채 경기를 지켜보면서 구자철은 그라운드를 넓게 보는 방법을 익혔다고 한다.

 

구자철의 인터뷰에따르면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수비수가 4명인데' 중앙 수비수 2명 중에서 한 명을 스토퍼로 맨투맨을 시키고

한 명을 처지는 스위퍼로 뒀어요. 제가 스위퍼 자리에 서면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굉장히 많이 썼죠.

계속 생각하면서 수비 라인을 당기고' 말을 많이 하면서 경기를 했어요.

"스위퍼를 보면서 항상 넓게 보는 데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또 미드필더를 뛰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뛰고 있는 미드필더들에게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려고 했죠." 

 

스위퍼로 뛰던 중3 시절에도' 구자철은 자신이 미드필드로 돌아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최종 수비수로 뛰는 시간은' 어쩌면 좋은 미드필더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이었다.

 

"항상 앞에서 뛰고 있는 미드필더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려고 했어요.

저도 제가 뛸 위치가 스위퍼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때 들었던 충고가 지금 수비를 보고 있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

뒤에서 다 보면서 배우고 있는 거라고' 공격을 해도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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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은 계속 축구일기를 써나가면서 자기 플레이를 되짚었다고함

 

이후 보인정보산업고로 진학한 구자철은 줄곧 미드필더로 활동했고

고3이던 2006년 백록기를 앞두고 빈혈로 한달간 입원했으나

철분제를 먹고뛰면서 보인고를 백록기에 우승시킨다.

당시 이경기를 보러왔던 제주 정해성감독의 눈에 띄고 대학에 가려고하던 구자철을 설득해

드래프트 3순위로 (당시k리그는 드래프트제) 제주에 입단시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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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은 2007년 데뷔시즌에 리그 10경기에 1골이라는 나쁘지않은 성적을 기록한다

더불어서 u18대표팀에 처음발탁되어 주전으로 발돋움하게된다.

 

하지만 이듬해 2008년쯤 잔부상에 시달렸고

허정무감독이 동아시안컵 대표팀에 발탁하는등 주목받는 유망주로 활약하다

2009년 제주의 핵심미드필더로 거듭나고 u20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으며8강을 가게되고

라이트팬들로부터도 주목받게된다.

 

이후는 동아시안컵도 또가고하나 월드컵탈락,

절치부심하고2010시즌 도움왕먹고 제주준우승,

아시안컵 득점왕 이후 볼프스행

 

 

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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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서 누나둘에이어 태어난 지동원은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도내 달리기 대표였다고함.

등 떠밀리듯 초등학교 5학년때 재주도 도 대표로 육상대회에 출전했고

화북초 코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공을 차기 시작했다고함.

배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지중식씨의 운동신경을 타고나서 대형유망주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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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한 오현중에서 5차례 득점왕에 오른 지동원은 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전남유스인 광양제철고로 진학하게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u16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지동원은 축협의 유럽유학 프로젝트에 뽑히게된다

 

지동원말로는 믿기지않아서 무슨 비리가 있나라고 생각해서 코치한테 물어봤다고.

고1 여름에 지동원은 남태희(알두하일) ,김원식 (서울) 과함께

설기현이 몸담기도했던 레딩으로 1년간 축구유학을 떠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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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동원은 레딩에서 선택받지못했다. 장기계약까지 간 남태희에비해

지동원은 언어문제를 드러내며 적응에도 어려웠고

출전기회를 잡지못하며 본인말대로 밑바닥을 봤다고 말한다.

지동원 말로는 그닥 이시기에 성장하지못했다고한다. 오히려 국내로 돌아와서 더 성장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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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양제철고로 돌아온 지동원은 절치부심하면서 고교리그를 십어먹는다.

한살후배 이종호와함께 광양제철고의 투톱을 이룬 지동원은

2009시즌 고교리그 14경기에서 17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2010년 우선지명으로 전남에 입단한 지동원은 시즌 29경기 13골을 기록한다.

허정무감독은 원래 지동원이 조금만더 일찍터졌으면 월드컵에 데려가려고 했었다고.

 

지동원은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르고 시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뽑아낸다

이후 박주영의 공백을 아시안컵에서 메우며 4골을 기록하게된다.

 

 

손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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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 자란 손흥민은 중학교 들어가기전까지 축구부에있지 않았음

일화 (현재 성남) , 울산현대에서 뛰었고 국가대표팀 까지 가본

아버지 손웅정씨는 자기만의 축구철학으로 손흥민을 축구부에 보내지않고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이 끝나면 공지천에서 아버지와 공을가지고 훈련하면서 기본을익힘.

체력훈련이나 다른건 하지않음

 

손흥민은 춘천 부안 초등학교 졸업후 후평중으로 진학함.

후평중은 축구부가없었고 중1때 강원도 도민체전에 학교대표(그냥 축구잘하는애 모아서)로 갔다가

축구부가 나선 육민관중에 0-4로 대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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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부를 담당했던 김문경 육민관중 교감은 "흥민이가 분을 삭이며 날 찾아와 육민관중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고 떠올렸다고함.

 

이 경기후 손웅정씨가 직접 찾아와 아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축구부에 입단함.

나승화 감독의 지휘 아래 빠른 템포의 플레이를 구사하던 육민관중이 손흥민에게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고함.

테스트를 해본 나감독은 볼을 가지고 치고나갈때의 속도를 보고 단번에 승낙했다고함

 

2006년 여름부터 손흥민은 축구부에 들어갔고 처음엔 팀플레이나 이런부분에 약했으나 점점 팀에 익히면서 나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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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은 육민관중을 끌고 이종호가있던 3관왕 축구명문 광양제철고와의 경기에서

돋보이면서 지역적 유망주에서 전국급 유망주로 점점 알려지게됨.

중3이던 2007년쯤 여러 대회에 나가게되고 금강대기 ,축협회장배에 출전하고 전국체전에서 그룹 준우승을 차지함.

 

나감독은 송경섭 축협 전임지도강사에게 전화를해서 당시 u16대표팀에 손흥민을 추천함.

12세나 14세대표팀에 든적도없는 무명선수라 기대안하고 원주로가서 플레이를 보자마자

피지컬능력은 모자랐지만 슛팅임팩트와 속도를보고 재목이다 싶어서 후보군에 올림.

 

육민관중에서 이름을 알린덕에 2008년 3월 u16대표팀에도 뽑히고 당시 FC서울 유스던 동북고로 진학함.

고교무대에서 간간히 교체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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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송경섭강사의 추천으로 축협 유학프로젝트에 발탁되어 동북고를 자퇴하고

김민혁 (현 사간도스),김종필 (현 도쿠시마보르티스) 과함께 함부르크 유스로 들어가게됨.

나머지 3명은 뉘른베르크로 유학간 선수들. 지금은 은퇴한 이강도 뉘른베르크 유학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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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손흥민의 축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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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로 간 손흥민은 2009년 u17 월드컵 티켓이 걸린대회였던 2008년 10월 u16대회에 콜업되어 출전하게됨.

당시 감독은 얼마전 돌아가신 고 이광종 감독.

당시 주전은 이종호와 이강이었고 김진수,임창우도 여기서 주전으로 뛰었음

손흥민은 로테이션정도의 위치였는데 이대회에서 4골을 뽑아내며 괜찮을 활약을하고

팀은 이란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월드컵티켓을 따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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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 손흥민의 주니어 b(후베닐 b격) 기록 15경기 9골, 주니어 a (후베닐 a격) 1경기 뜀

어시기록은 집계가 안되는건지 모르겠음

시즌을 마친 손흥민은 2009년 u17대회를 준비하고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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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이강, 김진수 ,김민혁 ,남승우 등과함께 대회에출전한 손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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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회 출전해서 1차전 우루과이를 상대로 남승우선제골,

손흥민의 결승골,이종호의 추가골로 3:1로 승리하게된다

2차전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나 3차전에서 알제리를상대로 이종호의 선제골에 이어

추가골을 손흥민이 넣으면서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에서 멕시코에 승부차기로 승리한 한국은 8강에서 나이지리아를 만나고

손흥민이 중거리로 동점골을 넣으나 1:3으로 패하게된다.

이대회를 기점으로 손흥민을 잉글랜드와 다른 독일클럽들이 노리나

함부르크 유소년팀과 11월 계약을 다시 체결하고 주니어 a무대에서 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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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시즌 주니어 a(후베닐a) 손흥민의기록. 이시기에 레기오날리가 (4부리그)에 있던 함부르크 b팀의 경기에도 나간다.

여름이되자 유스코치의 추천을 받은 당시 함부르크의 감독 아르민페는

손흥민을 1군스쿼드에 합류시키고 프리시즌경기에 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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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함부르크의 맴버였던 말년의 반니 .그외에도 제호베르투 게레로등이 있었다

이 프리시즌에서 손흥민은 득점행진과 활약을 이 나갔고 자신이 1군스쿼드에 들어갈만한 충분함을 입증했다.

 

그러나 첼시와의 프리시즌에서 부상당한후 개막후 3개월간 결장하다

10월에서야 분데스리가 데뷔전을갖고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넣으면서

프로무대이자 유럽빅리그에 본격적으로 입성하게된다.

 

이후는 아시안컵에서 국가대표로 뛰게되고 11-12시즌에 로테이션 12-13시즌에 주전으로 도약하게된다.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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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중 시절)

 

이재성은 아버지가 축구선수 출신이었고 현역 축구선수인 형 이재권을따라 축구를 처음 시작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부에 들어간 건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03년이었다.

그러나 이재성은 이미 그 전부터 축구선수가 될 자질을 발휘했다.

 

당시 이승재 옥동초 이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흐뭇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도 잠깐씩 대회에 데리고 나갔어요.

그때는 본격적으로 축구부 생활을 할 때도 아니었는데 대회 나가면 5,6학년들보다 더 잘 했죠.

가르치면서도 참 의아했던 건 패스 타이밍과 볼 관리 능력이죠.

제가 봤을 땐 안 된다고 생각하는 타이밍에 스루패스를 수비 뒤 공간에 넣어주더라고요.

중심을 잃고 넘어질 듯 하면서도 이내 균형을 잡아 볼을 관리하는 게 참 신기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거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왜소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잘 됐네요.”

 

“당시에 우리학교 멤버가 좋았어요. 전국에서 축구 좀 한다는 팀과 선수들이

‘옥동초등학교에 이재성이라고 축구 잘 하는 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들 우리와 경기하러 찾아올 정도였죠.

한 번 실력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그때 재성이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저 아이는 뭐든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했죠.”

 

옥동초에서 이재성은 빠르게 판단하라는 위주의 훈련을 통해 계속 익혀나갔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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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은 울산의 축구명문 학성중으로 진학했고 3학년때 축구협회장배를 우승시키고 4골과 MVP를 수상했다.

이후 울산 학성고로 진학한 이재성은 측면미드필더로 주로 나서며 두각을 나타냈다.

2010년 고교리그 왕중왕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고려대로 진학했고

이시기에 연이 별로없던 태극마크 및 각급대표도 아시아드대회등 u22대회와 덴소컵 대표로 출전하며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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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시절의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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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진출과 동시에 적은 이재성의 목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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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진출직전인 2013년 대학리그 31경기 14골을 기록한 이재성은 2014년 전북에 입단했다

신인의 무덤이라는 전북에서도 빠르게 인정을 받으며 주전으로 발돋움했고

데뷔 첫시즌 우승과 인천 아시안게임우승을 차지한다.

 

이후는 국가대표팀선발, k리그 mvp,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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