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낱말들이 이름표가 붙은 술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좌절은 좌절이라는 잔이고 절망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잔이다.
내가 너에게 절망, 회의,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는 심연에 대해 얘기하면
낱말들이 담고 있던 알딸딸한 것을 너에게 부어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의 절망이 곧 너의 절망이 아니듯,
내 잔에 담긴 알딸딸한 것이 너의 잔을 가득 채우지는 못한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나의 절망을 가득 담고도 너의 잔이 모자라서
그 알딸딸한 것들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일이다
전하고픈 절망들은 군데군데 잘려나가
술잔 언저리에서 나뒹군다
너는 지금 네 잔 속에 가득한 내 절망들을 보며
흘러넘친 내 절망들을 대충 닦아내고는
나도 너와 같은 절망 속에 있다며
네 맘 내가 다 안다며, 우리는 건배한다
나는 내 절망이 닦여나간 자리 위에
텅 빈 너의 술잔이 놓인 것을 가만히 보며
그 텅 빈 잔에 다시 나의 슬픔을 채워넣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빈 잔으로 두기로 하였다
몇 번의 건배가 오가고 자리가 파한 후에
다시 집에 와서 침대에 눕는다
한참을 누워있다보면 다시 몸을 일으켜서
다른 누군가와 흘러넘치지 않게
오롯이 담긴 한 잔을 해볼수는 없을까,
하고 바라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여
집 앞의 아무 편의점이나 들러
맥주를 사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