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이 있은 뒤 얼마 지나 일본의 홍콩 공격도 개시됩니다.
일본제23군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3시 55분에 대본영으로부터 '사쿠라 사쿠라' 라는 암호전문을 받습니다.
홍콩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였죠. 11분 후인 오전 4시 6분에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홍콩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홍콩 시간은 진주만보다 18시간 30분 빠르므로
홍콩시간 8일 새벽 3시 55분은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 25분으로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고 34분이 지난 시점이었죠.
오전 7시 20분 광저우 비행장을 이륙한 일본기들이 카이탁 공항에 있던 영국군 항공기 십여 대를 파괴합니다.
민항기도 공습을 피하기 어려웠는데 살아남은 여객기는
중화민국 건국자인 손문의 미망인과 장개석 총통의 처형인 송씨 자매 등 요인들을 태우고 그날 안으로 홍콩을 떠나기도 합니다.
심천강에서는 영국공병들이 다리를 파괴했지만
일본군 38사단 병력은 심천강에 부교를 놓고 건너 본토 끝자락에 도달합니다.
구룡지역 진 드링커스 라인에 배치된 3개 대대병력이 공격,
영국군이 초전에 작은 승리를 몇 번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12월 9일 밤 성문저수지 남쪽에 있는 강력한 진지인 성문보 전투를 통해 고지대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격퇴되고 맙니다.
(사실 당시 일본군의 사정도 복잡했는데 영국군의 탈환의지가 좀 더 강했으면 전황이 다르게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홍콩 주둔군은 구룡반도의 수비대에 단 한 척의 배도 보내주지 않고 오직 포격만을 되풀이 합니다.
무엇보다 상대가 중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이라는 것에 대하여 일본군은 개전 초부터 상당한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도 약 3,000의 영국군 수비대는 불과 1개 대대의 일본군 선발대에게 거의 전멸을 당합니다.
1개 대대면 지원부대까지 합해도 겨우 700명이 약간 넘는 수준인데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영국군과 필승의 각오로 도전하는 일본군의 대결이였던 셈이죠.
일본군의 전술에는 사실 새롭거나 참신한 요소는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휘관은 주도권을 중시했고 병사 개인의 감투정신에 크게 의존했죠.
그들은 잘 훈련되었고 대부분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억세고 야간전투에 능숙한 일본병사는 평지 뿐 아니라 산악전에도 익숙했고 전장의 지형지물도 교묘하게 활용했습니다.
경무장한 일본병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기동했고 용맹함과 교활함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성문보를 점령하거나 홍콩섬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이 특별강습부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보병이였습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D 증대 병력이 이 때 구룡반도 방어를 위해 증원됩니다. 하지만 전선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죠.
12월 11일이 되자 몰트비는 영국군과 영연방군 구룡방어 병력을 빼내 홍콩 섬으로 철수를 명령합니다.
이 때 제5 라지푸트 대대는 끝까지 남아 퇴각하는 병력의 후위를 맡습니다.
영국군은 예정보다 빠른 5일 만에 구룡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165명, 49명이 포로가 되었죠.
일본군 전사자는 22명, 부상자는 121명이였습니다.
중포의 도착을 기다리며 전선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홍콩의 요새포와 중포들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계속 포격을 가해왔죠.
이로 인하여 일본군의 보급로인 도로가 파괴되어 트럭에 의한 물자 수송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만
일본군에게는 별다른 장애가 되진 못했습니다.
홍콩공략에 나선 일본군은 트럭으로 나를 만한 중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들은 경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훗날 과달카날에서도 일본군은 신속한 전개를 위해 중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중장비는 놔두고 미군을 공격합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일본군도 모르는 바는 아니였지만, 반대로 이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전투력과 전투의지를 과소평가했죠.
주도권을 잡아보기도 전에 병사들의 감투정신에만 의지,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적자원을 그냥 사지에 밀어넣어버리게 됩니다.
(1941년 12월 13일 아침에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는 일본 사절단의 모습. Hong Kong 1941-45, P.49)
(홍콩전투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뿌린 전단. Hong Kong 1941-45, P.48)
일본군은 영국군과 영연방 수비군에게 13일과 17일 두 번에 걸쳐 항복을 요구하지만 거부하죠.
"홍콩 총독과 총사령관은 홍콩 항복에 관한 협상에 들어갈 것을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며 앞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교섭도 하지 않을 것임을 사카이 다카시 중장과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에게 통고한다."
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