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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미국시간 12월7일) 진주만이 불타던 날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군사령관 휘하의 일본의 각 군은 동남아침공을 위한 작전을 개시. 
 
 
 
1941년 12월 8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진 홍콩 전투를 통해 홍콩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과정을 얘기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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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으로 부터 남경조약을 통해 영국이 얻은 식민지였습니다. 
1860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북경조약으로 홍콩을 마주보는 본토의 구룡(코우룬)을 양도받고 
1898년엔 구룡 북쪽의 신계마저 99년간 조차하게 되죠.
본토 구룡지역과 홍콩 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의 남부해안의 조그마한 지역에 불과했지만 중국인의 인구밀도는 매우 높았죠.
극동에서의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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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빅토리아 시티의 모습.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al1940.jpg ) 
 

 
윈스턴 처칠은 처음엔 이 지역을 전초기지로 간주, 
공격에 대비해 특별히 수비력을 강화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곳의 영국군 주둔 병력을 철수시켜 유럽전선으로 차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1941년 9월, 극동에서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그는 이 같은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주둔지 병력을 영연방 군으로 증강하죠. 
(보다 더 중요시 여긴 말레이 주둔군의 불만과 의혹을 의식해 전초기지로 규정한 1940년 정책이 바뀐 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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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Maltby )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의 지휘를 받는 12,000명의 사단급병력이 배치가 완료되는데, 영국 육군과 캐나다와 인도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 
그리고 자원,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홍콩의용방위군단(Hong Kong Volunteer Defence Corps = HKVDC)소속이였습니다.
 
홍콩의용방위군단에 대해선 첨부한 링크 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콩 공방전과 홍콩의 함락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링크에서,
24부까지 이어지니 시간날 때 천천히 둘러보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미약하나마 제1차 대전형 구축함과 몇 대의 어뢰정(MTB)이 해상에서 지원하게 되고요.
대부분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몰트비 소장은 영국군과 인도군으로 편성된 3개 대대 병력을 우선 본토 조차지인 북부 구룡지역의 방어선을 따라 배치하는데 
(정규보병대대로는 영국대대, 인도대대 및 캐나다대대가 2개씩 있었습니다)
 
왕립스코트연대 제2대대를 서부에, 제14펀잡연대 제2대대(제2/14펀잡대대)로 중앙을, 
그리고 제7라지푸트연대 제5대대(제5/7라지푸트대대)를 동부 수비임무를 맡깁니다.
 
영국대대와 인도대대는 1937년부터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면서 전투력이 저하되었는데 
왕립스코트 대대는 많은 병력이 군사재판을 받고 영창에 들어가 기강이 해이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야포들을 관장하던 홍콩-싱가포르 왕립포병대(Hong Kong-Singapore Royal Artillery = HKSRA)
역시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빼앗겼죠.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이였고 
펀잡대대의 경우 전 병력의 40%가 1941년 10월에 도착했는데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이였습니다.
경험많은 장교가 부족하여 젊은 장교가 높은 직위를 감당해야 했고 
인도의 이슬람 병사로 이루어진 인도대대를 지휘하는 영국장교가 병사들의 언어인 우르두 어를 몰라서 
지휘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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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8Km에 걸쳐 벙커와 참호로 방어선을 구축하죠.
'진 드링커스 라인'으로 방어선을 명명하는데 일본군에 대항해 야포의 지원하에 몇 달간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목표는 지연작전. 구룡의 항구시설 폭파후 구룡반도에 전개된 포병대와 함께 홍콩섬으로 철수였죠. 
1938년 당시엔 개전후 48시간으로 정했으나 이후 늘어난 겁니다)
한편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캐나다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 
그리고 비커스 기관총 48정을 가진 기관총대대인 영국 미들에섹스연대 제1대대를 홍콩섬에서 남부 해안선에 걸친 방어를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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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스 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machine_g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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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린 왈루스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Walr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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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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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주변 기뢰 및 방책 설치 상황. http://indicatorloops.com/hongkong.htm ) 
 
영국군을 배후에 두고 대 중국전을 지속할 일본군은 절대 아니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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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 http://en.wikipedia.org/wiki/Takashi_Sakai ) 
 
사카이 다카시 중장의 지휘 하에 제23군의 52,000 병력 중 
사노 타다요시 중장의 증강된 보병제38사단은 해군의 지원 하에 상륙준비를 마치고 결전에 대비합니다. 
실제로 당시 제23군은 4개 사단과 1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포병의 규모는 1개 연대보다 훨씬 컸습니다. 
홍콩상륙에 필요한 주정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요.
4:1이 넘는 병력비였죠. (일본군의 전력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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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전투의 전개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hong_k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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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식 75mm 산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Type_41_75_mm_Mountain_G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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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식 보병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Type_92_Battalion_G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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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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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이 있은 뒤 얼마 지나 일본의 홍콩 공격도 개시됩니다. 
일본제23군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3시 55분에 대본영으로부터 '사쿠라 사쿠라' 라는 암호전문을 받습니다. 
 
홍콩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였죠. 11분 후인 오전 4시 6분에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홍콩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홍콩 시간은 진주만보다 18시간 30분 빠르므로 
홍콩시간 8일 새벽 3시 55분은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 25분으로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고 34분이 지난 시점이었죠.
 
오전 7시 20분 광저우 비행장을 이륙한 일본기들이 카이탁 공항에 있던 영국군 항공기 십여 대를 파괴합니다.
민항기도 공습을 피하기 어려웠는데 살아남은 여객기는 
중화민국 건국자인 손문의 미망인과 장개석 총통의 처형인 송씨 자매 등 요인들을 태우고 그날 안으로 홍콩을 떠나기도 합니다.
 
심천강에서는 영국공병들이 다리를 파괴했지만
일본군 38사단 병력은 심천강에 부교를 놓고 건너 본토 끝자락에 도달합니다.
 
구룡지역 진 드링커스 라인에 배치된 3개 대대병력이 공격, 
영국군이 초전에 작은 승리를 몇 번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12월 9일 밤 성문저수지 남쪽에 있는 강력한 진지인 성문보 전투를 통해 고지대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격퇴되고 맙니다.
(사실 당시 일본군의 사정도 복잡했는데 영국군의 탈환의지가 좀 더 강했으면 전황이 다르게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홍콩 주둔군은 구룡반도의 수비대에 단 한 척의 배도 보내주지 않고 오직 포격만을 되풀이 합니다.
무엇보다 상대가 중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이라는 것에 대하여 일본군은 개전 초부터 상당한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도 약 3,000의 영국군 수비대는 불과 1개 대대의 일본군 선발대에게 거의 전멸을 당합니다. 
1개 대대면 지원부대까지 합해도 겨우 700명이 약간 넘는 수준인데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영국군과 필승의 각오로 도전하는 일본군의 대결이였던 셈이죠.
 
일본군의 전술에는 사실 새롭거나 참신한 요소는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휘관은 주도권을 중시했고 병사 개인의 감투정신에 크게 의존했죠.
그들은 잘 훈련되었고 대부분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억세고 야간전투에 능숙한 일본병사는 평지 뿐 아니라 산악전에도 익숙했고 전장의 지형지물도 교묘하게 활용했습니다.
경무장한 일본병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기동했고 용맹함과 교활함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성문보를 점령하거나 홍콩섬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이 특별강습부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보병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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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D 증대 병력이 이 때 구룡반도 방어를 위해 증원됩니다. 하지만 전선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죠.
12월 11일이 되자 몰트비는 영국군과 영연방군 구룡방어 병력을 빼내 홍콩 섬으로 철수를 명령합니다.
이 때 제5 라지푸트 대대는 끝까지 남아 퇴각하는 병력의 후위를 맡습니다.
 
영국군은 예정보다 빠른 5일 만에 구룡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165명, 49명이 포로가 되었죠.
일본군 전사자는 22명, 부상자는 121명이였습니다. 
 
중포의 도착을 기다리며 전선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홍콩의 요새포와 중포들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계속 포격을 가해왔죠. 
이로 인하여 일본군의 보급로인 도로가 파괴되어 트럭에 의한 물자 수송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만
 
일본군에게는 별다른 장애가 되진 못했습니다. 
홍콩공략에 나선 일본군은 트럭으로 나를 만한 중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들은 경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훗날 과달카날에서도 일본군은 신속한 전개를 위해 중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중장비는 놔두고 미군을 공격합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일본군도 모르는 바는 아니였지만, 반대로 이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전투력과 전투의지를 과소평가했죠.
주도권을 잡아보기도 전에 병사들의 감투정신에만 의지,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적자원을 그냥 사지에 밀어넣어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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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3일 아침에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는 일본 사절단의 모습. Hong Kong 1941-45,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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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전투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뿌린 전단. Hong Kong 1941-45, P.48) 

 
 
일본군은 영국군과 영연방 수비군에게 13일과 17일 두 번에 걸쳐 항복을 요구하지만 거부하죠.
"홍콩 총독과 총사령관은 홍콩 항복에 관한 협상에 들어갈 것을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며 앞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교섭도 하지 않을 것임을 사카이 다카시 중장과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에게 통고한다."
 
몰트비 소장은 영국군이 당분간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중국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홍콩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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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반도에서 홍콩섬으로 철수한 영국군 병력들은 1941년 12월 14일 저녁까지 새로운 위치에 전개합니다.
몰트비는 철수한 존 라슨 준장의 홍콩보병여단. 
그 주력인 제2/14펀잡대대와 캐나다 위니펙 대대로 서부여단(West Brigade)을 편성합니다. 
사령부를 황니천 계곡에 두고 서쪽 절반을 방어하죠.
 
세드릭 월리스 준장이 지휘하는 구룡보병여단은 이제 동부여단(East Brigade)으로 이름이 바뀌어 
사령부를 대담 계곡에 두고 홍콩 섬의 동쪽 절반을 담당. 주력은 제5/7라지푸트 대대와 캐나다 왕립소총대대로 구성하고요.
영국 미들에섹스연대 제1대대와 홍콩의용대에겐 예비대로 이 두 개 여단을 지원하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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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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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는 순간. 일본군이 타고 온 주정들이 전용의 상륙주정이 아니라 일반주정임을 알 수 있음. 출처 : Hong Kong 1941-45, P.52) 
 
 
12월 18일 일본군은 노스포인트와 알드리히 만 사이에 상륙합니다.
침묵을 치키고 있던 일본군 중포들이 포격을 시작하고, 
홍콩상공에는 탄착관측기가 포탄의 탄착을 수정해주고 있었죠. 
이들 포격은 약 4시간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병력을 가득히 실은 주정들이 출발하게 됩니다. 
이 주정들을 향해 영국군은 탄막을 만들며 저항했지만, 
당시 홍콩주둔군의 중기관총은 이 주정을 관통시킬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주정들은 탄환을 튕겨내며 전진을 계속, 상륙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은 그 때 당시 영국군보다 우월한 92식 중기관총을 설치한 뒤 영국군 방어진지에 사격을 가하죠. 
약 6시간의 상륙작전은 성공적이어서 일본군은 극히 일부의 피해만 입고서 홍콩시가로 돌입하게 됩니다. 
 
구룡반도에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노스포인트에서 1개 중대당 2개 대대의 일본군과 맞서야 했던 라지푸트 대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에게 제압당해 자정까지 해안에서 밀려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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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도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고, 일본군의 전진은 시가 외곽에서 멈추게 됩니다. 
홍콩 시내에는 20,000의 영국군이 버티고 있었으나, 홍콩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과 6,000명의 병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는 제공권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항공기가 항상 영국군의 머리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반복하여 영국군의 전력을 약화시켰고 
일본군의 중포대도 정확한 포격으로 영국군의 진지를 유린했습니다. 
 
일본군의 상륙병력은 우선 반격을 가해오는 영국군을 먼저 전멸시킨 후,
 당시 일본군에게도 많지않던 장갑차를 선두로 시내에 돌격하죠. 
 
6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91식 장갑차는 영국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였고, 
이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가 불행히도 영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전선을 축소, 방어진지의 강화에 힘썼고, 
일본군도 이를 추격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도 단기간의 전투를 치룬 후 병력의 피해가 커서 후속병력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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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섬 상륙 및 전투.출처 : Hong Kong 1941-45, P.57) 

 

 
동부여단은 스탠리 반도로 이동, 반격을 준비하지만 포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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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9일 황니천계곡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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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 https://www.idmarch.org/document/John+K.+Lawson/JXD-show/ ) 

 

 

그 다음 날 일본군은 서부지역인 황니천 계곡을 공격, 서부여단 사령부를 급습. 

이 과정에서 여단장 존 켈번 로슨 준장이 전사합니다.

영국군은 다시는 이 지역을 회복할 수 없었고, 

일본육군은 스탠리 반도의 동부와 서부여단 사이를 갈라놓으며 방어선이 두동강나고 결과는 파멸적이였습니다. 

 

일본군의 전진은 22일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지닌 75mm 산포가 최전방의 영국군 진지를 직격탄으로 모두 파괴하고, 

다시 장갑차가 선두로 나서 돌격을 개시하죠. 

 

영국군은 이를 격퇴했으나, 2대의 장갑차가 영국군 방어진지 속으로 들어와 난사하며 헤집고 다녀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죠. 

이들 일본군의 장갑차는 영국군의 포대를 유린하며 영국군을 추격합니다. 

 

일본군은 영국군에게 틈을 주지 않고 추격을 개시, 24일에는 영국군에게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습니다. 

오직 요새포만이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있을 뿐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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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24일 - 25일에 걸친 스탠리 반도의 방어상황.출처 : Hong Kong 1941-45, P.80) 
 

또한 홍콩섬에 상륙한 일본군은 저수지를 점령하고 급수 시스템을 장악, 

영국군은 보유탄약이 다 떨어져가는 상황에 식수난까지도 겹쳐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급기야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엔 세인트스티븐 칼리지 야전병원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입원중이던 영국군과 영연방군 

그리고 의료진마저 고문하고 학살해버립니다. 항복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포로의 대우에 대한 협약은 1929~30년 사이에 추가되는데 일본은 제네바 협약 체결국이 아니였습니다.

 

그 날이 지나기 전에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해집니다.

사격중지 명령과 함께 몰트비 소장과 마크 영 홍콩 총독은 사카이 다카시 중장에게 항복합니다.

 

이 날은 "블랙 크리스마스" 로 알려지게 됩니다.

 

주둔지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병력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전쟁포로가 되고 말죠. 

(그 후 이들이 어떤 과정을 겪었을 지는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12월 25일 항복 직후 무장해제 과정에서 일본군의 포로 처리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던 수 명의 영국군 장교가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자 

바로 군도로 즉결처분한 일도 있습니다.

 

일본군이야 '귀축미영'이라 생각하면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면 당연히 영국에게도 선전포고를 한 '셈'이라고 쳤을지 모르지만,

영국에게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켜 공격을 한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사항입니다.

 

서구세력이 일본군을 문명이 아닌 야만세력으로 간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죠.

홍콩공방전을 통해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전사, 부상, 실종자는 약 4,400명. 
일본군의 전사, 부상자는 2,700명으로 기록됐습니다.

 

홍콩전투(23)-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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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항공대의 폭격으로 불타는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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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포격으로 중유탱크가 폭발, 치솟는 연기를 배경으로 홍콩항에 돌입하는 해군육전대(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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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반도의 영국군 진지에 포격을 하는 일본군 포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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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38사단은 홍콩 함락 직후 병사들에게 공식적으로 3일 간의 휴가를 줌. 
이것은 약탈을 허용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일본 병사들은 3일간 홍콩 전역을 휩쓸면서 약탈과 강간을 자행. 
1941년 12월 28일 오후 2시 구룡시에서 일본 육해군 2천명이 참가하는 승리 퍼레이드, 합동 입성식이 거행, 
뒤이어 3시에는 홍콩시에서 같은 행사가 거행됨.
선두에서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이끄는 인물이 제38사단장 사노 중장.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일부 병사들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고 있었음.
 
사카이 중장은 전후 중국 국민당군에 체포되어 남경군사재판에 회부 총살형에 처해짐.
 
위 링크를 통해 당시 관련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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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1956년 12월 18일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투표결과 
만장일치로 일본을 유엔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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