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의 증인이라고 한다면 김구선생을 들수있는데 김구선생의 경우 한인애국단 창설, 한국 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등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 뺴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자신은 독립운동에 투신한걸 후회하지 않지만 살면서 생전에 한순간의 일이 후회된다고 적었는에 위의 일화는 이렇다.
1910년 김구가 동료 독립운동가인 노백린과 같이 황해도 재령군을 지나칠 당시 한 청년이 부부싸움중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된다.
심지어 청년이 총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청년이 아내를 죽이려는줄 알고 그집을 방문해 청년을 혼낸뒤 그에게서 총을 빼앗아 버린다.
당시에는 엄격한 유교사회의 잔재가 남아있었기에 어른인 김구의 말을 청년이 어찌해볼 도리는 없는것으로 김구와 노백린은 현장에서 떠난다.
김구선생은 한신문의 난 소식을 듣고 청년에게서 총을 빼앗은것을 후회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에게서 총을 뺴앗긴 청년이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의거를 시도한것이다.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일파이자 매국노로 지금도 이완용이라는 이름이 욕으로 쓰일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너무 유명한 매국노이다.
그런 매국노가 대낮에 흉기공격을 당한것으로 이완용은 수십군데를 찔리고 병원에 실려갔으며 의거를 시도한 그청년은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이완용의 암살을 시도한 인물은 바로 이재명 의사로 의사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마음을 먹었고 1910년 그날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총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들 안 아내가 자식하고 나는 어쩌냐며 말리는통에 총기오발사고가 났으며 그것을 본 김구일행이 이재명 의사에게서 총을 뺏은것이다.
결국 암살실패로 1910년 이재명 의사는 22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해 불꽃같은 삶을 마쳤으며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동령장을 추서했으며 위패를 서울 현충원에 안장했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그에게서 총을 빼앗은뒤 에야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았다며 그순간을 평생 후회한다는 내용을 백범일지에 적었고 그때의 실수를 더이상 하지읺게 위해 한단체를 창설한다.
바로 한인애국단으로 우리가 아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이단체 회원으로 일왕암살과 홍커우 공원의거등 독립운동역사를 바꾸었으며 이재명 의사의 의거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는 하나의 트리거가 된다.
민간인 강도살인 후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고 자기 야욕 때문에 백색테러 저질러 같은 민족 죽인, 선한 얼굴 사진으로 본 행적이 왜곡되고 미화된 희대의 거품.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