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갈량의 1차 북벌 배경
당시 위나라는 226년에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제로 등극하여 민심이 어수선한 상황이였습니다.
촉나라 재상 제갈량은 위가 혼란한 틈을 놓치지 않고 227년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표문을 올려 북벌을 뜻을 알리니 이 표문이 바로 그 유명한 출사표입니다.
221~222년에 일어난 이릉대전 이후 촉한의 국력을 꾸준하게 키워왔던 제갈량은 마침내 228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을 일으킵니다.
당시 북벌 상황을 보면 강족, 저족 등의 이민족들과 연계, 맹달 회유, 기산우회작전 등 전략적으로 많은 준비를 치뤘고 제갈량집에 따르면 제갈량이 당시 일으킨 병력 20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절반이 보급병이겠으나 실로 엄청난 수의 군대를 동원했던 것이죠. 제갈량이 이 1차 북벌을 위해 얼마나 원기옥을 모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제갈량의 1차 북벌 전략
제갈량은 1차 북벌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마속과 전략을 고안해냈는데 여기서 나온 전략이 기산우회공격 즉, 성동격서(동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서쪽을 친다.)의 전술로 상대를 허를 찌르는 전략입니다.
촉한의 침공 루트 4가지
위의 지도를 보시면 A, B, C, D 4가지의 진격 경로가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경로이자 위나라가 생각하고 있던 촉나라의 공격 경로가 바로 진령 산맥을 넘는 B, D 루트입니다.
요충지인 진창과 미현을 점거할 수 있는 루트니까요.
하지만 지형이 험한 진령 산맥을 넘는 것은 수비하는 쪽이 막기 편하게 오는 것이기 때문에 위나라가 유리하다는 것이 자명했습니다.
여기서 제갈량의 A루트(기산우회작전)와 위연의 C루트(자오곡 계책) 이 나옵니다.
제갈량은 B루트로 진령 산맥을 넘어 야곡을 통해 미현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자신은 '기산도' 라 불리는 A루트로 우회하여 농서의 5군을 손에 넣고 옹주지역을 병탄하여 양주(서량)와 위나라를 끊어버리고자 했습니다.
서량 지역은 위나라에 말을 공급해주는 지역으로 위나라 기병의 근원인데 서량과 위나라를 단절시켜버리면 위나라의 자랑인 기병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니 아주 중요한 지역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야곡도에서 위나라 본진을 묶고 훼이크를 성공시켜 줄 네임드 장수가 필요했는데 이 장수가 바로 조운이였습니다.
이렇게 조운이 야곡도로 들어가 위나라 본진과 싸우고 있는 사이 제갈량은 기산도를 타고 농서 5군을 평정하는 기산우회전략이 구상되면서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됩니다.
3. 제갈량의 1차 북벌 전황
(1) 농서 평정
5년의 원기옥을 모은 제갈량은 228년 정월(아마 1월 쯔음) 군대를 일으켜 북벌을 시작합니다.
제갈량은 전략대로 진군장군 조운과 그의 부장으로 양무장군 등지를 보내 기곡에 주둔하게 합니다.
제갈량이 조운을 선봉으로 야곡도를 통해 미현을 친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는 대장군 조진에게 대군을 주어 미현에 주둔시킵니다.
조운의 촉군과 조진의 위군은 기곡에서 전투를 벌였고 병사 수는 촉군이 더 많았으나 어그로를 위한 오합지졸들이였기 때문에 조진의 본진과의 전투에서 고전합니다.
그 사이 제갈량의 본진은 기산도를 통해 기산으로 진격했고 미현으로 진격한 줄 알았던 제갈량이 들이닥치자 위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릉대전에서 대패를 겪었던 촉이 불과 5년만에 대군을 이끌고 진격했다는 점도 놀라운데 우회하여 예측하지 못한 기습 공격까지 받아버리니 공격받은 농서 지역은 물론 위나라의 신료들조차 혼비백산이 되어버린거죠.
제갈량의 기습으로 혼란에 빠진 농서 지역은 천수, 남안, 안정 농서 3군이 순식간에 촉나라로 넘어가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옹주자사 곽회는 상규로 후퇴합니다.
제갈량의 기습 우회를 알게된 위나라는 혼란에 빠졌으나 조예는 "병법에도 안에 쳐박힌 적과 싸우기보다 적을 밖으로 끌어내 싸우라 했는데 산 속에 틀어박혀 있던 제갈량이 스스로 나왔으니 오히려 고맙다" 라고 말하며 대담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렇게 신료들을 안심시킨 조예는 좌장군 장합에게 5만 대군을 주어 옹주를 구원하게 합니다.
한편, 옹주에 들어선 제갈량은 병력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농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을 펼칩니다.
그리고 위나라에서 옹주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통로인 가정을 틀어막기 위해 선봉을 뽑습니다.
전황 요약 지도
(2) 가정 전투
가정은 산과 산 사이 평지가 있는 지형이며 보급하기 편한 길목이 있는 중요한 지역입니다.
가정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모두 길이 험하여 보급과 연락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장합은 이를 인지하고 5만의 병력들을 모두 가정으로 이끌었습니다.
제갈량 역시 옹주로 오는 입구인 가정을 틀어막아야 된다고 생각했고요.
대부분의 장수들은 가정에 위연이나 오의를 보내야 한다고 했으나 제갈량은 마속에게 왕평, 장유, 황습, 이성을 부장으로 하여 가정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정 근처의 열유성에 고성을 보내 성을 지키고 마속과 연계하여 가정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가정으로 보낸 병사의 수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가정 전투의 피해 규모에 대한 기록으로 추측해보면 대략 1만~1만 5천 정도가 아닐까 예상됩니다.
가정의 현재 모습
마속의 촉군은 위나라보다 빠르게 가정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마속은 제갈량의 작전 명령에 따라 진을 쳐야 했죠
제갈량이 정확히 무엇을 명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성을 점령하고 길목을 막으라는 지시가 아니였을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치자고 했습니다.
부장이였던 왕평은 마속을 말렸으나 마속은 '거고임하자 세여파죽' 이라 말하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공격해야 이길 수 있다' 는 병법을 근거로 이를 듣지 않습니다.
왕평을 제외한 나머지 부장 3명 역시 마속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고 결국 왕평은 부장의 권한으로 군사 1000여명을 따로 인솔하여 다른 곳에 진을 쳤습니다.
장합은 뒤늦게 도착하였으나 전세를 파악한 후에 여유로웠습니다.
촉군의 급수로(물의 보급로)를 끊고 산을 포위하여 촉군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촉군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한 장합은 들이닥쳐서 마속 군대를 궤멸시킵니다.
대패 당한 마속은 병력도 수습하지 않은 채 도주합니다.
그러나 왕평은 따로 보존해 놓았던 1000여명의 병사로 북을 쳐서 제자리를 지키도록 했고 이에 장합은 복병이 의심스러워 주춤합니다.
그 사이 왕평은 대패를 당해 흩어졌던 잔존 병력들을 수습하여 퇴각하는데 성공합니다.
가정 전투 전황 지도 (가정의 위치, 왕평의 위치 역시 불분명하여 필자의 개인 의견을 토대로 해석한것이니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패배로 곽회의 공격을 받은 열유성마저 무너지고 농서를 평정하던 제갈량마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제갈량은 퇴각을 결정하고 위나라의 허를 찌른 1차 북벌이 허무하게 끝나게 됩니다.
기곡에서 조진과 전투를 벌이던 조운 역시 가정의 패배와 기산 퇴각으로 패배하였고 조진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조운은 직접 군을 통솔하여 뒤를 끊고 잔도를 불태워 조진의 추격을 막았고 패배한 촉군을 훌륭하게 수습하여 퇴각합니다.
퇴각에 성공한 촉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제갈량, 조운 등은 직책이 강등되었으며 마속은 처형당합니다.
4. 제갈량의 1차 북벌의 실패
결국 가정에서의 패배로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실패하였습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가장 성공률이 높은 북벌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위나라가 예상하지 못한 루트로 기습하여 제대로된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조예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며 나라가 어수선하였으며 이민족과의 연계작전에 호응해주는 등 말 그대로 제갈량이 할 수 있는 모든 계책으로 원기옥을 모아 터뜨려낸 것이 바로 이 1차 북벌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가정에서의 쓰라린 패배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여기에 여러 의문이 생길 겁니다.
(1) 제갈량은 왜 마속을 주장으로 보냈나?
당시 촉군의 장수들은 위연, 오의처럼 경험 많은 장수를 보내 가정을 방어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가정으로 보냅니다.
그것도 기록에 이름이 언급되는 무장 4명을 부장으로 삼아서.
장합의 위군 기록에 이름이 언급된 무장은 주장 장합과 부장 비요가 끝이라는 점을 보면 마속의 지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네임드 부장을 무려 4명이나 딸려 보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갈량은 1차 북벌 전략을 구상할 때 마속과 밤낮으로 의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기산기습작전을 기획한 참모가 마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진해서 가정을 지키겠다는 마속을 말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제갈량이 농서를 평정해야 했다는 것 역시 이유가 될 수 있죠.
기록을 보면 제갈량은 병력을 여러군데로 파견하여 농서 병탄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를 시행할 장군들이 필요해서 위연, 오의를 보내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지형을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장합의 진격을 막아야했기 때문에 위연, 오의보다 참모로서 전략적인 모습을 보여준 마속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거죠.
(2) 마속은 왜 산 위에 진을 쳤나?
첫번째로, 병법에 따라 고지를 선점한 것입니다. 이는 이미 마속 본인이 주장한 것이죠.
두번째로, 허를 찌르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기산우회작전 같은 전략을 보면 마속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고안하는 참모라고 생각됩니다. 가정을 방어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선 것이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진을 쳐서 정군산 전투처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마속은 법정과 다르게 보급을 안일하게 생각하는 등 모자란 부분이 많았습니다.
세번째로, 공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합을 막아 시간을 장기전으로 끌기보다 장합을 격파하여 참모가 아닌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했을 수 있습니다.
(3) 마속이 왜 산 위에 진을 치면 안되었나?
첫번째로, 제갈량의 절도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 왕평의 간언이 제갈량의 절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갈량의 작전 명령을 무시했다는 것부터 일이 틀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보급의 안일함 입니다. 산 위에 진을 치면 상대가 산을 타고 올라올 때야 유리하겠지만 산을 포위하고 보급을 끊어버리고 기다리면 불리해집니다. 일례로 정군산 전투에서 법정이 산 밑에 황충이 산 위에 진을 쳐 보급과 연계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인데 마속은 자신의 군대를 산 정상에 진을 치게 하고 왕평의 1천 병력만이 떨어진 곳에 진을 쳤으니 연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번째로, 성이라는 방어적 이점을 스스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장합전에서도 마속이 성을 점거하지 않은 일에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정성의 민심이 촉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성을 점거하지도 않고 산 위에 올라간 것은 매우 위험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제갈량의 책임은?
가정의 패배 책임은 마속에게 있으나 마속을 주장으로 가정으로 보낸 용인술은 확실하게 제갈량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제갈량이 마속을 구원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없냐 라는 물음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제갈량의 지원 여부가 기록에 남은게 없어서 명쾌하게 대답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속의 패배는 제갈량이 천수 주민들을 만나기도 전에 소식이 들려올 정도로 빠르게 패배했습니다. 제갈량의 본대는 서량의 서막, 상규의 곽회를 견재하며 농서를 병탄해야되니 가정 지원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가정 패배의 책임은 마속이지만 북벌 실패의 책임은 제갈량한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읍참마속, 마속은 왜 처형당했나?
마속이 가정에서 대패 당하고 혼자 도주했을 때 한중에 있던 상랑이 이를 눈감아주다가 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패배한 장수가 혼자 한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눈 감아주었다' 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도주 방식이 정상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즉, '마속은 군령을 어겨서 대패 당하고 병사 수습도 안한 채 혼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도주한 장수' 인 것입니다.
처형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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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도 아닌 단순 삼국지 좋아하는 사람의 지식과 의견일 뿐이니 전문적인 분들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이 틀렸다고, 의견이 말이 안된다고 너무 비난하진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