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원(승려에게 불경을 가르치는 사찰 내 학교)의 학승들이 가을 수확철에 장경각 뒤쪽의 잣나무 숲으로 잣을 따러 갔다.
그런데 잣나무가 워낙 높아 한 나무에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다른 나무로 올라가려면 힘이 드니까, 몸이 재빠른 학인(불경을 공부하는 승려)들은 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냥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그렇게 잣을 따다가 한 학인이 자칫 실수하여 나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그 밑에 낙옆이 수복이 쌓여 있어 몸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학인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순간 어머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 생각이 일어나자 그는 이미 속가의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배가 많이 고픈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길쌈을 하고 있는 누나의 등을 짚으며 ‘밥을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머니와 함께 길쌈을 하던 누나가 갑자기 펄펄 뛰며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것이었다.
누나가 아프다고 하자 면목이 없어진 그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리밥과 풋나물을 된장국에 풀어 바가지에 담아 와서는 시퍼런 칼을 들고 이리저리 내두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네 이놈 객귀야, 어서 먹고 썩 물러가라.’
그는 깜짝 놀라 뛰어나오며 투덜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집. 내 생전에 다시 찾아오나 봐라! 그래, 나도 참 별일이지. 중이 된 몸으로 집에는 무엇 하러 왔나? 더군다나 사람대접을 이렇게 하는 집에…. 가자. 나의 진짜 집 해인사로.”
그리고는 해인사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길 옆 꽃밭에서 청춘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울리며 신나게 놀고 있으니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유혹하였다.
“스님, 우리랑 함께 놀다가 가세요.”
“중이 어찌 이런 곳에서 놀 수 있겠소?’
“에잇. 그놈의 중! 간이 적어서 평생 중질밖에 못해 먹겠다.”
사양을 하고 돌아서는 그를 보고 여인은 욕을 퍼부었다. 욕을 하든 말든 다시 해인사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길가에 서 있다가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억지로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십 명의 무인들이 활을 쏘아 잡은 노루를 구워 먹으면서 함께 먹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도 간신히 뿌리치고 절에 도착하니 재(齋)가 있는지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들어보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하고 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 딸랑딸랑 ‘제경행상’ 딸랑딸랑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령: 염불할 때 손에 쥐고 흔드는 작은 종. 구세군 실버벨과 비슷하게 생겼음.)
(바리때: 스님이 쓰는 밥그릇)
(제경행상: 불공드리는 순서와 방법을 다룬 책)
‘참 이상한 염불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열반당(涅槃堂) 간병실로 가보니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었고, 그를 발로 툭 차는 순간 그는 살아났다.
그런데 조금 전에 집에서 보았던 누나와 어머니는 물론 여러 조객들이 자기를 앞에 놓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그는 살아난 자신을 보고 기절 초풍을 하는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어머니, 왜 여기 와서 울고 계십니까?’’
“네 놈이 산에 잣을 따러 갔다가 죽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이 진정 일장춘몽이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제 집에서 누나가 아픈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죽는다고 하여 밥을 바가지에 풀어서 버렸더니 다시 살아나더구나.”
그는 다시 자신을 위해 염불을 해주던 도반 스님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들으니 너는 은행나무 바리때만 찾고 너는 제경행상만을 찾던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냐?”
“나는 전부터 은행나무로 만든 너의 바리때를 매우 갖고 싶었어. 너의 유품 중에서 그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하게 나던지…. 너를 위해 염불을 하면서도 ‘은행나무 바리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나도 역시 그랬다네. 네가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제경행상諸經行相』이라는 책이 하도 탐이 나서….”
죽었다가 살아난 학인은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무인들이 노루고기를 먹던 장소를 가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취는 없고 큰 벌집만 하나 있었다. 꿀을 따는 벌들이 열심히 그 집을 드나들고 있을 뿐….
다시 미모의 여인이 붙들고 매달리던 곳으로 가보니 굵직한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으며, 청춘남녀가 풍악을 울리며 놀던 곳에는 비단개구리들이 모여 울고 있었다.
“휴, 내가 만일 청춘남녀나 무사· 미녀의 유혹에 빠졌다면 분명 개구리· 뱀· 벌 중 하나로 태어났을 것이 아닌가!”
출처: 일타스님, "영가천도 기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