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최종선씨는 자신의 형과 함께 자신의 직장에 방문하게 됨
사실 최종선씨는 중앙정보부의 용원으로 작년에 수석으로 입사한 엘리트 요원이었음.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형을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최종선씨의 형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였는데, 당시 있었던 유럽 간첩단 사건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위해서 방문 요청을 한 것. 최종선씨는 말단이기도 했고, 자신도 국가공무원이고 형도 국가공무원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에 형을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옴.
그런데 자신이 퇴근하면서 출입사무소를 방문했는데 자신의 형의 주민등록증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함. 최종선씨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자신의 직장인데 설마라는 생각으로 퇴근함.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출입사무소를 방문했는데 아직까지도 형의 주민등록증이 남아있는 것을 목격함. 최종선씨는 바로 감찰실장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고, 감찰실장도 이상하다면서 수사담당과에 연락하고는 별 일 없을거라며 얘기함.
그리고 3일 후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음. 자신의 형이 심문 끝에 자신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
그러나 많은 의문점이 있는 것이 단순 참고인 조사로 간 형이 왜 간첩임을 자백했으며, 간첩인 사람이 투신자살을 할 때까지 방관했다는 중정의 태도도 기이했음.
형이 간첩이라는걸 믿기 힘들었던 최종선씨는 현장을 직접 가보겠다고 하였으나 중정에서는 안 된다며 저지했음. 그럼에도 몰래 빠져나가 확인해 본 현장에는 사건 당일임에도 어떠한 사건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음.
중앙정보부는 최종선씨에게 부검 입회를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끼리 해버리면 '살해 후 은폐'라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가족 대표로 참관하고 문제 없음을 시인하라는 것. 거부하는 최종선씨에게 중정은 가족과 형의 동료들의 안전을 걸고 협박했고, 최종선씨는 해당 조건을 걸고 부검에 입회하겠다고 함. 그럼에도 중앙정보부는 서면으로 확답을 주는 것을 거부했음.
그러면서 중정은 최종선씨에게 형의 가족들에게 탄원서에 대한 서명을 받아올 것을 요구하는데, 이 내용은 최종선씨의 형이 간첩임을 인정하니 용서해달라는 내용. 최종선씨는 형의 가족들의 안전과 신변보호를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서명을 했고, 형수도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서명했음. 최종선씨는 부검할 때 자신 측 의사와 변호인과 함께 입회하겠다 했으나, 중정은 거절했고, 결국 최종선씨는 부검을 입회하지 않고 중정에서 독단적으로 부검 후 투신자살로 결론 내림. 장례식 또한 관을 열어볼 수 없게 밀봉해버린 채로 진행했고, 분향소 설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조문객들의 조문 또한 없이 초라하게 진행됐음.
장례식이 끝나고 4일 후
탄원서를 제출했음에도 중정은 실명을 얘기하며 약속은 가볍게 무시해버림. 중정은 "최교수가 누명을 쓰고 중정에 의해 죽었다 라는 '유언비어'가 담긴 유인물이 대학가 중심으로 퍼지고 있어 반정부 시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라는 이유로 공개를 했다는 변명을 함
이 소식을 들은 동생 최종선 씨는 놀라운 결정을 함.
자신이 이 사건을 통해 겪은 일들을 수기로 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혼절한 척을 했고, 자신의 친구가 있는 병원으로 이송이 됨. 그는 정신병원에서는 중정의 통제가 어렵다는 점을 이용, 스스로를 2주간 정신병원에 수감시키며 수기를 작성함.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형을 죽인 직장으로 돌아가서 내부에서 증거를 수집했고, 자신의 형이 무죄임을 밝히고자 했음.
이 수기는 6월 민주항쟁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공개가 되었고, 이 수기와 최종선씨가 내부에서 수집한 당시 최종길 교수의 사건기록지, 기타 여러 증언들을 통해 결국 최종길 교수가 무죄이고 고문치사 당할 때까지 자신이 간첩이라고 자백한 적이 없음을 밝혀내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함.
뒷 이야기도 편집할까 했는데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하고 기네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던 방송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