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단오풍정
온양행궁
한증막
조선시대 유교사상 ‘알몸전신욕’ 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
조선시대로 오면서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종교적 환경의 변화로 목욕문화가 변화를 맞게 된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의 혼욕과 알몸 노출목욕을 불온한 행위로 간주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다. 이때부터 집에서 옷을 입은 채, 겨우 함지박과 대야를 이용한 수준의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목욕풍속은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유교사상이긴 하지만 청결을 중시하여 부분목욕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별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황실에서도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 궁안과 양반가의 부분목욕문화는 상이하지 않았다. 조선의 부분욕은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로 구분된다.
하루에 꼭 하는 부분욕으로 세수, 이닦기, 뒷물이 있다. 수시로 하는 것은 손, 발씻기이다.
조선의 목욕풍속이 부분목욕이다 보니 전신욕은 연례행사로 별도 행해졌는데,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7월 15일 등(늦봄에서 늦여름)이다.
귀족계급에게 국한, 서민과는 별개의 목욕풍속
우리 민족 복식풍속이 버선을 신는 것이어서 발가락 사이 때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궁안을 중심으로 귀족계급에게만 별개의 미용목욕 개념이 발달하였다. 그 방법은 자연에서 얻은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뿌리줄 등을 중탕하여 목욕물에 섞어 입욕하는 미용탕으로, 대표적인 것은 인삼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과 찐마늘을 목면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마늘탕을 즐겼다.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미용탕인 난탕은 몸에서 은은한 향내를 나게 하는데 효과적이어서 혼례를 앞둔 상류층 신부에게 즐겨 행하는 탕요법이다.
고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온천욕을 즐겼는데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세종, 세조가 온양온천에 머무르며 목욕하고 유숙하였다고 한다.
치료를 위한 전신욕, 온천욕과 한증욕
한증욕이란 흙, 바위를 소재로 불로 달군 후, 멍석, 가마니를 깔고 눕거나 앉아 땀을 내는 방식으로 현대의 불가마가 한증법의 유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특색에 따라 바위, 흙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한증방법은 같지만 약효는 차이가 있었다. 한증욕 풍습은 그 후에도 산야초(감나무순, 밤나무순 등)를 끓여 수증기를 쬐는 방식으로 발달하였으며 현대의 스팀미용법의 유래로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 1905년 서울 서린동에 개업
왕실에서는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1905년 서울 서린동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모르는 사람끼리 발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은 문화라서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 본격적으로 생겨났으며, 1962년 최초로 한증막이 등장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