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14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져 집안이 망함
가장노릇을 위해 10대때부터 신문배달을 했고
열심히 청춘을 보내며 직접 번 돈과 장학금으로 연대를 졸업함
장학금은 한성실업이란 곳에서 받았었는데 원랜 졸업 후 유학을 가려했었음
근데 한성실업 사장이 졸업전에 '우리회사에서 조금만 일해줄수 있냐?' 라고 딜함
유학 전 돈도 벌겸 & 장학금의 감사함으로 인해 그렇게 하기로함
근데 잠깐 일할 회사였는데 막상 가보니 비효율적인 것도 많고 체계도 없어서
혼자서 효율적인 업무 방법과 프로세스등을 만듬
거기다 팔리지도 않던 원단이나 다른 재고들도 혼자서 영업하며 다 팔아버림
사장이 너무 예뻐하여 유학비도 직접 지원해줄테니 이제 하려던 공부하고 오라함
그렇게 지원받아 영국 유학을 떠나려고 경유하던 동남아에서 경험삼아 공장들도 둘러봤는데
동남아 국가에서 쓰는 제품 생산 기계랑 한국 생산 기계랑 비슷한거임
그래서 동남아 공장에서 샘플하나 얻어다 다른나라 돌면서
"우리가 이런 원단 만들어 줄테니 니네 살래? 싸게줄게"라고
딜하면서 계약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따옴
한성실업 사장은 "아니 놀다오라고 돈 줬는데 뭔 계약을 이렇게 많이 따왔어?!"라며 놀랐고
이 계약의 양이 한국 공장을 1년 동안 돌려도 모자랄 만큼의 양이였다고 함
그렇게 한성실업은 강제 수출기업이 돼버렸고 이게 국내 최초의 섬유제품 직수출이였음
그렇게 입사한지 6년만에 임원이 됐음
그렇게 일하다 다시 유학을 가려고 회사를 관뒀는데 여권이 안나옴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전 거래처 사람이 와서 '우리가 물건이 있긴한데 파는 방법을 모르겠다'
라며 영업좀 도와달라고 함
역시나 일을 너무 잘해서 그 거래처 사장이 차라리 동업을 하자고 제안함
그렇게 만30세에 회사를 창업했는데 20대를 영업판에서 보냈기에 영업력하난 기가 막혔음
창업하자마자 곧바로 동남아로 출장을 가서 30만달러짜리 계약을 따옴
즉, 창업하자마자 대박이 난거임
그렇게 첫 해에만 60만달러의 매출을 올림
(당시 우리나라 1인당소득 150달러시절..)
그리고 더 나아가 아예 해외영업망을 제대로 구축해야겠다 해서 해외지사설립도 함(국내최초)
원단부터 점차 의류, 장난감 등등 한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들을
가리지않고 엄청나게 수출을 해댐
그렇게 창업 5년만에 5천만달러 수출을 기록하며 금탑산업훈장까지 받음
생긴지 5년된 회사가 대한민국 수출의 3%를 담당할 정도;;
70년대 중후반부턴 중공업,자동차등 제조업등에도 진출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걸 수출하겠다는 의지로 세계화에 집념을 보임
그리고 당시 상사맨이라 하면 이 회사를 상징하며 창립 11년만인 78년에
대한민국 전체 수출 1위를 달성하고 90년대엔 국가 전체수출의 10%를 이 회사가 차지함
아프리카등 힘든 오지와 한국과 미수교 국가까지 몸소가서 수출망을 뚫고 올 정도로
일하나는 기가막혔음
80년대 중후반부턴 동유럽에 진출하여 여러 회사 및 자동차 회사들과 M&A를 진행하며
몸집을 부풀렸고 90년대엔 세계 경영을 외치며 구 공산권 국가에 까지 진출을 함
이 회사는 바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수출해대던 대우그룹임
(서울역 앞의 前 대우그룹본사, 드라마 미생의 배경이 된 회사)
그렇게 창업 30여년만인 98년에는 41개 계열사, 약 400개의 해외법인을 거느린 그룹이 됨
당해 수출액은 약 190억달러로 한국 수출액의 14%까지 담당했었음
그렇게 재계서열 2위가 된 김우중은 IMF가 터지고 실체가 밝혀지며 가라앉기 시작함
회사의 몸집은 컸지만 실상은 분식회계로 실적과 재무재표가 구라임이 밝혀지며 내실이 텅텅비었음이 알려졌고
당시 대우의 대내외 부채는 약 90조원에 달했음
(사실 이 이 시절 대기업들의 분식회계는 종종 있는 일로 대출금의 이자와 빚을 갚는 것에 대한 리스크보다 사업 확장을 해가며 세계개척을 해나가던 시절이였다. 그럼에도 저 부채는 감당이 안되는 부채액..)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명언을 남겼던 그는
추징금을 피해 해외로 잠적해버렸고 2019년 사망했다.
이 양반 때문에 스스로 목숨 끊은 중소기업사장만 몇 십명
지옥에서 지은 죄 값 받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