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진해기지사령부에 있는
'지덕칠 중사' 동상 앞에서는 매해 초 추모제가 열린다. 해군과 해병대가 참석하는 이 행사는
55년 째 이어져오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 지덕칠함>
지덕칠 (1940 ~ 1967)
1940년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사직정에서 태어난 지덕칠은 어린 시절, 해방의 혼란기와 전쟁을 겪으며 매우 어렵게 자랐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학비를 면제해준다고 하여 복싱부에 자원하여 복싱 라이트급 선수로 뛰었다.
동생 3명이 있는 그는 가정을 건사해야 했으므로 학업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서울 동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려고 하였으나 형편이 어려워 결국 23살까지 졸업하지 못하였고, 해군 병사로 입대 후, 장기 지원을 하여 위생 특기 (의무) 하사로 임관하였다.
1966년 9월 3일 해병대 제2여단 청룡부대(현재 해병 2사단)의 위생하사관(의무부사관)으로 발령을 받고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다.
<지덕칠 중사의 어린 시절과, 베트남 파병 후 맨밥에 한국에서 온 간장에 기뻐하며 밥을 비벼먹는 모습 등이
찍혀있다.>
1967년 2월 미 해군 수중폭파반 (UDT)을 엄호하는 강구작전에 해병 청룡부대 1개 소대와 함께 투입된 지덕칠 중사는 작전지역내의 마을을 탐색 중 베트콩 2개 중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때 적탄 속에 뛰어들어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출해 냈으며, 자신도 어깨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먼저 후송되지 않고
M14 소총으로 베트콩을 사살하는 등 치료와 응전을 거듭, 오전 11시경부터 오후 4시경까지 모든 부상병들이 후송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으로 부상병 3명을 보호하면서 베트콩 약 2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마지막 부상병을 싣고 자신도 헬리콥터에 탑승하였으나 결국 심한 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사망 당시 지덕칠 중사의 몸에는 8발의 탄환이 박혀있었다.
생존 병사들의 증언과 미 해군, 국군의 교차검증으로 1967년 일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군인정신을 기리는 동상이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안에 세워졌다.
해군은 고인의 호국정신을 기려 매년 투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발휘한 전투부대의 중ㆍ하사를
최대 3명까지 선발하여 '지덕칠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덕칠 중사는 한국군 유일의 의무특기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