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전쟁의 특징적인 풍경들이 있다. 공동묘지로 변한 공원, 짐짝처럼 마차 위를 덮고 있는 피난민 가족, 지뢰가 깔린 도로, 서지 않았다가는 죽게 되는 검문소 따위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섬뜩한 풍경은 도시 한복판을 장식하고 있는 시커멓게 타버린 폐허 터인데, 언제나 예외 없이 모스크가 파괴된 자리였다. 에스닉 클렌징(Ethnic Cleansing, 인종 청소)의 목표는 단순히 무슬림들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스니아에 남아있는 그들의 삶의 궤적조차도 없애는 것이었다.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러자면 역사의 심장을 도려내야 했고,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모스크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하듯 역사를 마음대로 왜곡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증인은 코라자크 출신으로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던 한 젊은 무슬림 남자가 다른 죄수들 앞에서 고문당했다고 진술했다.
경비들은 그의 전신을 심하게 구타하고 이빨이 다 빠질 정도로 두들겨 팼다.
그런 다음 경비들은 전선 한 끝을 그의 고환에 묶고, 다른 한 쪽은 그의 오토바이에 묶은 다음 경비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몰고 갔다."
에민 야쿠보비치라는 생존자는 기자들에게 오말스카 간수들로부터 죄수 세 사람을 거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나에게 다른 죄수들의 고환을 맨이빨로 물어뜯어 잘라내도록 강제로 시켰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보스니아는 인간성의 기본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드는데, 특히 고문이 그렇다.
따지고 보면 고문에 한계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나? 이미 고문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못할 고문이 없는 것이다.
고문에 착수해 죄수의 살에 첫 상처를 내거나 얼굴을 처음 가격하는 순간 그는 이미 도덕과는 등을 돌린 것이다.
고문자는 돌연 자신이 가학적 쾌락으로 가득찬 신세계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목을 따거나 성기를 따거나 도덕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답 같은 것은 없다. 구둣발로 남의 신체를 걷어찰 수 있는 배짱이 있다면 여자의 유방을 도려낼 배짱도 있는 것이다.
남을 죽이기는 하되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짓은 안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좀 정상을 참작해서 봐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냥 마음대로 해도 되고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아무 집이나 쳐들어가 그 집 가장의 머리에 총을 대고,
'네 딸이랑 떡을 쳐라. 아니면 최소한 떡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보스니아에서 그런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아버지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러면 이렇게 대꾸하는 거다.
그래, 좋아, 늙은이. 널 쏘진 않을 거야. 대신 네 딸을 쏘겠어.
그러면 아버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호소하고 애원하지만 총을 든 자는 딸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안전핀을 푼 후 소리친다.
자, 이제 해! 아니면 쏜다!
아버지는 울면서 혼이 나간 사람의 동작으로 느릿느릿 바지 혁대를 푼다. 자기가 해야 할 짓을 믿을 수가 없는 채로.
총 든 자는 웃으며 말한다. 옳지, 늙은이. 자, 바지 벗고 딸 치마 올리고, 즐기라구!'
'총 든 자는 자신이 바로 법이고 신처럼 느껴진다.
수용소 생존자들은 고문을 하는 측들이 못할 짓을 하는 동안 웃고 노래하고 술에 취하는 등 기묘하게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냥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감을 느끼면서.
그들은 세상의 온갖 금기를 다 깨뜨릴 수 있었으며 어떤 법도 이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이들은 특종에 목마른 외신 기자들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냥 현장에 접근을 못하게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됐다.'
'고문은 오락활동이 됐다. 경비원들은 죄수들이 서로 구타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어느날 밤에 우리를 한참 동안 패던 경비들이 지쳤습니다."
이브라힘이 말했다.
"그래서 죄수들끼리 서로를 패도록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경비 한 사람이 나와 다른 죄수를 불러내더군요.
다른 죄수한테는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하고 나더러 그의 얼굴을 최대한 세게 치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런데도 경비는 내가 살살 치고 있다며 총대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습니다. 내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계속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죄수를 불러내어 나를 치도록 시켰습니다."
검투사 쇼 시간이었다. 오말스카 수용소 경비들은 가족끼리 싸우게 하고는 특히 즐거워했다.
아들에게 아버지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최대한 세게.'
'경비들은 심지어 자기 친구들까지 수용소에 초대해 함께 재미를 봤다.
수용소 밖의 민간인들이 놀러와서 죄수들을 때리고 강간하고 죽이는 것으로 하룻밤 파티를 벌이는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것은 그 세르비아 민간인들이 쾌락의 밤을 지내기 위해 수용소에 들어서는 이유이다.
오랜 원수를 갚고 싶다는 것이다.
수감자들은 자기들이 아는 세르비아인이 수용소에 갑자기 나타나면 그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 뒤에 숨어야 했다.
가난한 세르비아 사람이 5년 전 자기를 직장에서 해고한 사장을 찾아온 걸 수도 있다.
한 농부가 10여 년 전 어느 날 자기에게 트랙터를 빌려주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나선 걸 수도 있다.
또 중년이 다 된 남자가 25년 전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여자애를 가로챈 남자를 찾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주 먼 과거의,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한 앙갚음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났다.'
'...우리가 양로원에 도착한 직후에 UN 구호활동 책임자인 호세-마리아 멘딜루치가 왔다.
그는 잘 차려입고 잘생긴 스페인인으로, 오물과 절망으로 둘러싸인 이 양로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한 할아버지는 복도에서 멘딜루치를 잡고 비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그의 따뜻한 손에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아니면 우리는 다 죽게 됩니다."
노인은 울면서 말했다. 그의 입김이 허옇게 보였다.
"우리는 얼어죽을 겁니다. 우리를 도와주셔야 해요."
멘딜루치는 친절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노인에게 절대로 당신이 얼어죽지 않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밤 멘딜루치는 난방이 잘 되고 스테이크와 고급 와인이 갖춰진 UN 숙소에서 잤다.
노인은 또다시 춥고 더러운 양로원에서 잤다.
'...한 방에 들어가니 할머니 세 명이 각자 침대에 들어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혼수상태로 이빨 없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고 숨소리조차 거의 없었다.
너무 쇠약해 뼈가 이쑤시개처럼 가늘고 약해 보였다.
피로에 지친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그 할머니의 뺨을 만져보고는 나를 향해,
마치 내가 시체를 기다리는 독수리라도 된다는 듯이 "아니, 아직은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다른 할머니들은 담요 밑에서 떨며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곧 다른 방으로 갔다.
폭격의 후폭풍으로 창문들이 다 깨져나가 복도에는 겨울 삭풍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고 지나갔다.
다른 방에도 할머니 세 명이 있었다. 한 할머니는 태아처럼 몸을 잔뜩 구부리고 누워 있었는데 거의 혼수상태인 듯했다.
그녀의 오줌이 얇은 매트리스를 지나 스며나와 침대 밑에 조금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방에 같이 있던 기자 한 사람이 그녀의 머리 가까이 귀를 대고 있다가 "물"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물을 한 컵 가져와 그녀의 입에 흘려 넣어줬다.
두 번째 할머니는 침대 끝에 앉아 휴대용 변기에 담긴 물로 뼈만 남은 얼굴을 씻고 있었다.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며 그녀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추워... 추워... 추워."
세 번째 밀레나 토팔로비치라는 할머니는 가운데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었는데, 죽어 있었다.
밤 사이에 추위를 못 이기고 죽은 것이다.
작고 푸른 눈은 아직 뜬 채로 하늘을 바라보듯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갈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방에는 기자 세 명이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서로를 바라봤다.
누가 할머니의 눈을 감겨줄 것인가? 누가 그녀의 얼굴을 시트로 덮을 것인가?
누가 그녀의 시신을 담요로 싸서 어딘가에 치워, 저 불쌍한 나머지 두 할머니가 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인가? 누가 할머니들을 위해 담요를 구해 올 것인가?
나는 전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그 방에서 마치 외계인 같았다.
두툼한 하이테크 의류에 고어텍스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지갑에는 달러와 여권이 있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 지옥에서 벗어나 파리나 비슷한 곳으로 날아가 리츠 호텔에 머물며 보스니아에서의 모험 이야기로 친구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해답은 세르비아 군인에게서 나왔다.
양로원 밖에 기자단 차량이 있는 것을 본 군인들이 안으로 들어왔고, 보는 기자마다 총구를 들이밀며 꺼지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그러면서 내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다.
양로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밀레나 토팔로비치가 사라예보의 양로원에서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할 정도로 생전에 남에게 못할 짓을 한 적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는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증오하는 만큼이나 외국 기자들을 증오했다.
그래서 인터뷰 한번에 500달러씩 요금을 부과했다.
인터뷰는 금방 끝났다. 그는 늘상 하는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아니다, 자신의 부대는 인종 청소에 가담하지 않았다.
아니다, 자기들은 수용자를 고문하지 않았다, 등등.
내 친구는 결국 분노하여 펜을 내려놓고 속에 있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당신 부대 병사들의 문제는 용감한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군인들을 상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마을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당신과 이야기를 하니 속이 아주 메스꺼울 지경이에요!"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속이야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지요. 그건 의사한테 가야지요."'
'정치에서는 적을 한 개인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나라가 전쟁에 나서려면 원한에 가득 차 있어야 하고,
그저 적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 죽일 준비가 돼 있는 정도로는 안 된다.
경계 태세를 갖춘 나라라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일이다.
죽일 각오를 할 게 아니라, 죽이고 싶어해야 한다.'
본문 출처는 피터 마쓰 - 네 이웃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