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반대 쪽에 있는 나라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남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그란 토레 산티아고가 있으며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160년 전,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최악의 화재 사고가 발생한다.
1863년 12월 8일,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아 산티아고는 신도들로 북적였다.
아르마스 광장에 위치한, 산티아고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교회 중 하나였던 컴퍼니 교회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교회 내부는 수백 개의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화환, 풍선, 리본, 거대 동상, 그리고 수천 개의 촛불과 파라핀 기름 램프로 장식되었다.
저녁 7시 45분경, 해가 저물면서 조수들은 교회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때 주 제단 꼭대기에 있던 기름 램프 하나가 떨어지면서 불이 베일에 옮겨 붙었다.
불길은 화환을 타고 나무로 된 천장까지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강풍 때문에 문이 열리면서 연단에서 촛불이 떨어져 불이 더 거세지고,
천장까지 불이 빠르게 옮겨붙었다.
이윽교 교회 내부는 탈출하기 위한 수 천명의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옆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지옥도 그 자체였다. 탈출하려다 질식사했거나 압사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생존자들은 시체들 위로 기어올라 탈출하려고 애써야 했다.
결국 200여 구가 넘는 시체더미에 정문 쪽이 완전히 막혀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일어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아치 문 아래에 1~2m 높이의 시체가 쌓여 있었으며
그 더미 사이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기사에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한 농부는 말을 타고 올가미를 교회 안으로 던져 몇 명을 끌어냈지만
안타깝게도 3번째 시도만에 줄이 끊어져 중단되었다.
또 어떤 시민은 오른쪽 문의 벽화를 파괴해 좁은 더미 안에서 4~5명의 여성을 구해냈다.
다른 시민들은 성벽을 부수고 구멍을 뚫어 몇 명의 사람들을 구해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후 8시경 종탑과 시계탑이 무너졌고, 오후 10시경 교회 안쪽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날 화재로 2천 500명 정도가 사망되었다고 추정되었다.
이 당시 산티아고에는 10만 명이 살고 있었으니, 도시 인구의 2.5%가 한 번의 화재에 죽은 것이었다.
산티아고 대주교는 교회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신의 저주로 해석했고, 결국 정부는 12월 14일 교회를 철거했다.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정원이 생겼고 사고 10년 후인 1873년 12월 8일 피해자 추모비와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나중에 피해자들이 묻힌 산티아고 공동 묘지 앞으로 옮겨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칠레의 모든 공공장소의 문은 탈출 경로로 해석되며
외부로 통할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법이 생겨났다.
또한, 제대로된 소방대가 없었던 칠레에 의용소방대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지금까지도 칠레 소방대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