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나갈때 몸에 그림그리기, 나체전사, 적의 뚝배기 수집, 인신공양(*다만 위커맨은 그냥 전설이라 함) 등등
그야말로 야만족 클리셰라 할만한 풍습은 다 가지고 있었던 탓에 우가우가로 오해받는 골족들이지만,
실제로는 통일 갈리아 제국이나 본격적인 국가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부족사회들 단위에 그쳐서 그렇지
고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도 "문명"이라 하기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골족들을 "야만족"이라 기록할 로마가
신화 속에서는 로물루스의 왕국, 현실에서는 근처 라틴족 도시들에서 쫓겨난
범죄자들과 난민들의 떨거지 소굴에 불과했던 기원전 8세기에
골족들은 이미 우수한 기술로 알프스 산맥에서 암염광산과 구리광산을 개발했고,
그리스 건축가를 초빙한 것으로 추측되는 시칠리아 건축 풍의 거대한 성채도시를 세웠으며
남쪽 이탈리아의 그리스인과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로 "야만족" 이 아닌 대등한 무역 파트너로서 거래했다.
켈트 문명이 역덕들이 흔히 떠올리는 호전적인 전사 중심의 사회가 된 것은
기원전 5세기경에 그리스 및 에트루리아와의 교역이 쇠퇴하여, 상업의 중심이었던 도시들이 쇠락한 뒤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고대 켈트 문명의 발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산이 바로 골족의 황금 유물들이다.
물론 동서고금에 금을 싫어한 문명이 어디 있었겠냐만, 금은 특히 골족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골족들이 금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며,
언제나 번쩍이는 금 장신구를 지니고 다녔다고 자주 언급했다.
또한 그들이 그 많은 금을 그렇게 쉽게 개발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골족의 토속적인 금 공예품들은 그들이 다른 문명권에서
딱히 다른 보석을 수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갈리아에는 원주민들이 힘든 채광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고유의 금이 많았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산기슭에 부딪치며 바위덩이를 깎아내면 금가루가 가득 쏟아졌던 것이다.
골족들은 금가루가 박힌 바위를 모은 뒤 부쉈고, 반복해가며 씻어 흙을 제거한 뒤 용광로에 녹였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장신구에 들어갈 금을 모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팔목과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무겁고 단단한 금깃을, 그리고 섬세한 반지와 가슴받이까지 했다.
내륙의 골족들은 신전과 성역에 제물로 바친 금을 놀랍게도 공개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금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는 골족들이었지만, 켈트의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주민들은 감히 그 금에 손끝 하나 대려 하지 않았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총서> 제5권 中]
알프스 산맥 북서쪽에서부터 라인 강가, 그리고 동쪽 보헤미아에 이르기까지
골족 족장들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무덤이 발굴될 때마다,
금깃, 금팔찌, 금잔, 금접시 등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금유물들이 어김없이 출토되었다.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켈트 사회답게, 종종 여성 귀족들의 무덤에서도 이런 호화로운 장식품들이 출토되어
그들이 생전에 남자 족장들에게도 비견될 만큼 아주 뛰어나고 지위가 높은 인물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골족들에게 금이 풍부하고 황금 예술품을 사랑했는데도,
왜 그에 비해 우리 후세인들에게는 골족 = 황금문명의 이미지가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한 가지는...
??? : 라비에누스, 안토니우스, 이 흘러빠진 켈트 신전에 "장난" 을 실시한다!!!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제물로 가득 찬 신전들을 약탈했으며, 도시들은 더욱 자주 약탈했는데
반란 진압 이상으로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는 그 결과 얻은 엄청난 양의 금을 1kg당 6000세스테르티우스에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에 팔았다.
- 수에토니우스, <12황제열전> 中
성스러운 호수와 연못들은 켈트의 신들께 바치는 제물로서 골족들이 금과 은을 던져넣은 곳이다.
로마인들은 갈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 호수들을 공매에 부쳤다.
호수를 산 사람들은 호수 바닥에 맷돌 모양으로 만든 커다란 은괴들이 들어 있음을 발견했다.
원주민들이 극진히 섬기던 성지라,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기에 많은 제물이 쌓여 있었다.
- 스트라보, <지리학> 제 3권 中]
물론 무조건 한 번 이상은 거르고 읽는 게 국룰인, 고대 로마의 악명높은 황색찌라시 기레기가 수에토니우스긴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금', '금을 지닌 골족' 에 대해 자주 언급한 점,
포르투갈 총독이나 갈리아 총독이 될 때마다 빚 떼먹고 튀려는거냐고 난리치는 채권자들에게
크라수스가 대신 보증을 서 주고 나서야 겨우 임지로 출발할 수 있었던 로마 제일의 빚쟁이 카이사르가
(*다만 인생을 방탕하게 막 살아서는 아니고, 야심만만한 정치인으로서 선거유세와 공공사업에 돈을 퍼부은 탓이었다)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역이 끝날 때쯤에는 빚을 싹 갚고, 휘하 군단병들에게 상여금까지 펑펑 뿌리고도
로마에서 손꼽힐 정도의 알부자가 된 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으로 인해 유입된 금이 금값과, 금에 대한 은의 상대적 가치까지 떨어뜨려
인플레를 유발할 정도였다는 기록 등이 교차검증되므로
수에토니우스가 과장은 했을망정 아예 없었던 일을 날조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후세에 전해졌더라면 프랑스는 물론 인류 전체의 귀한 유산이 되었을 골족의 황금유물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막대한 양이 로마의 토법고로 도가니 속으로 다이빙해
대머리 난봉꾼의 이마만큼이나 빛나는 금괴로 변하고 말았으리라는 것이다.
-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켈트족 : 고대 유럽의 정복자들" 에서
대 머리난봉꾼 총독님의 골족 문화 대약진으로 인해
골족의 황금유물들이 죄다 녹아버리는 앙증맞은 찐빠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옵티마테스들을 개같이 멸망시키고 원수정 시대를 열 밑천이 마련되었으니
이 어찌 군단병 좋고 민중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