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인근의 북서캅카스계 민족 체르케스인들은 1763년 흑해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두고자 북캅카스를 침략한 러시아 제국에 약 101년간 끈질기게 저항해온 전투민족이었다. 하지만 체급에서 절대적으로 밀린 탓에 러시아의 적국인 오스만 제국과 캅카스 내 여러 군소국가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온 의용군들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와 맞서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카자크들을 앞세운 러시아 제국군의 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수많은 체르케스 부족들이 절멸당했고, 그나마 살아있던 자들조차 강제이주를 당해 완전히 공백지가 된 체르케시야 영토에는 점차 카자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본래 느슨한 부족연맹으로 살던 체르케스인들은 1860년에 뒤늦게나마 생존을 위해 체르케스 마즐리스를 설립하여 차르와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차르 휘하의 러시아군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체르케시야로 진군하면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체르케스 주민들을 "말하는 짐승" 따위로 여기고 가축마냥 도살할 뿐이었다.
이후 1864년 4월 7일, 학살에서 살아남은 체르케스 마즐리스의 지도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러시아의 숙적 중 하나인 영국으로 탄원서 하나를 써서 보내게 되는데, 체르케스 마즐리스에서 보낸 탄원서의 이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훌륭한 영국의 여왕이자 황제이신 폐하께 저희 지도자들이 감히 보잘것없는 청원을 드리옵나이다.
창세 이래 러시아 정권이 불법적으로 저희의 고향이자 조국인 체르케시야를 정복 및 합병을 시도한지 80년이 지났사옵니다.
그놈들의 손에 넘어간 우리 아이들과 힘없는 여자와 노인들을 양처럼 학살하고, 그들의 머리를 멜론 자르듯이 총검으로 날려버리는데, 이러한 문명과 인류의 영역을 뛰어넘는 억압과 잔인한 행위는 형언할 수조차 없사옵니다.
저희는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대를 이어 생명과 재산들을 버려가면서까지 러시아 정권의 폭압적인 행보에 서슴없이 반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지난 1~2년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뭄과 황폐화로 인한 기근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벌어진 적들의 맹공으로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셨고, 많은 이들이 전투, 산 속에서의 기아, 해안에서의 빈곤, 해양기술 부족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러시아 정권의 잔혹한 공세를 물리치고 우리 조국과 민족을 구해줄 수 있는 인류의 수호자이자 정의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영국 정부와 국민들의 중재 및 소중한 지원을 간절히 촉구하옵나이다.
하지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원조를 감당할 수 없으시다면 기근과 적의 잔학무도한 공세로 죽어가는 비참하고 무력한 여성과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전시킬 시설만이라도 마련되길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이 2가지 요청 중 어느 하나라도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무력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를 향한 자비와 은총을 바라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완전히 전멸해버린다면,
우리는 만유의 주님 앞에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폐하께 통치와 힘과 권세를 맡기셨나이다.
저희는 '각하Henry Bulwer 경'가 저희의 무력하고 불행한 상황을 영국의 위대한 정부와 영광스러운 국민에게 알리는 매개체가 되기를 간청드리면서 감히 각하에게 이 보잘것없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나이다. 사본은 술탄 정부와 다른 강대국들의 대사관에 제출하였나이다.
체르케시야의 사람들이 서명하였음.
1280년 샤우왈 29일
안타깝게도 영국은 러시아에게 거의 합병된 거나 마찬가지인 체르케시야에 별다른 조치를 취한다거나 탄원서에 대한 답장조차 보내지 않았으며, 이후 체르케시야는 1864년 5월 21일 오늘날 크라스노다르의 크라스나야폴랴나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를 마지막으로 러시아 제국에 완전 합병되면서 반세기 동안 지속된 카프카스 전쟁도 종지부를 찍었다.
기나긴 전쟁에서 살아남은 수십만 명의 체르케스 주민들은 러시아군에 의해 강제로 흑해 해안가 쪽으로 밀려나던 도중 수많은 이들이 사망했으며, 이들을 싣고 오스만 제국으로 향하던 범선이 침몰하거나 그 안에 전염병이 돌아 또다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목적지까지 도착한다 해도 기아와 전염병, 현지인들과의 무력 분쟁 등이 체르케스 난민들을 한동안 계속 괴롭힐 뿐이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체르케스 디아스포라에선 매년 5월 21일을 러시아 제국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선조들을 추모하는 날로 기념하고 있으며, 체르케스의 사촌격에 속한 압하지야에서도 이 날을 애도일로 정하고 이를 추모하고 있다.
평생 동안 제 마음은 모국의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끊임없이 불타올랐습니다.
우리의 적 러시아인들과 싸우지 않는 그런 드문 순간마다 저는 상처를 붕대로 싸매고 어린이들을 양육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모국을 수호한다는 평생의 사명 아래 자식이 저와 함께 전쟁터에 합류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아들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저는 35년간 야만스러운 침략자들과의 명예로운 전투에서 얻은 16군데의 상흔을 여러분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전쟁에 패하더라도 인간성과 존엄성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반역자들이 몰락을 초래했지만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모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우리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고 그 영혼 안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제게 애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고귀한 말 위에 올라타 승리하여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적어도 저를 사랑하는 모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 우비흐와 체르케스 마즐리스의 마지막 지도자
'게란디코 베르제그'가 오스만 땅으로 추방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연설 -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