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노르만의 잉글랜드 통치는 계승일까, 정복일까?
같은 이름을 가진 통치자들 사이에 번호를 부여함으로써 혼란을 피할 수도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별명처럼 소급적이고 비공식적일 뿐만 아니라 당대적이고 공식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헨리 8세, 루이 14세, 나폴레옹 3세 등 군주에게 번호를 부여하는 관행에 대해 잘 알고 있다.
1066년 윌리엄 1세의 정복 이후 1272년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할 때까지 노르만 국왕과 플랜태저넷 국왕은 정복 이전 앵글로색슨 통치자들(웨식스 왕조)과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에드워드 1세는 정복 후 최초로 앵글로색슨 국왕의 이름을 딴 국왕이었지만, 그 이전의 마지막 에드워드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2세기 이상 앞서 통치했기 때문에 그를 단순하게 ‘에드워드 국왕’으로 부르는 것에 혼동할 위험은 거의 없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아들이자 이름을 딴 에드워드 2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에드워드 2세의 경우 ‘에드워드 국왕의 아들 에드워드 국왕’이라는 언급만으로도 그를 식별할 수 있었다.
공식 기록을 작성하는 책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것은 에드워드 2세의 이름을 딴 그의 아들이 차례로 그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에드워드 국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국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국왕’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황했다. 의회 회의록(Parliament Rolls)에서는 다른 접근 방식이 채택되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는 ‘정복 후 세 번째 에드워드 국왕(King Edward, the third after the conquest : le roi Edward, le tierz apres le conquest)’이 된 것이다. 이것은 1066년 노르만 정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시계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과거를 기념하는 스타일이다. 그 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에드워드들인, 대 에드워드[앨프레드 대왕의 아들],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는 안개가 자욱한 선사시대에 갇혀 있다. ‘세상에 지혜로운 어떤 사람들’ 그러니까 에드워드 3세를 위해 이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했다고 추정되는 사람도 이 역사관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13세기 초의 자료에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성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국왕, 이 이름의 세 번째’로 묘사되어 있으며,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직후인 1307년부터는 ‘영광스러운 기억의 군주,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위대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서거’로 분리된 언급이 있다. 이러한 공식은 연사들이 대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를 에드워드 1세, 2세, 3세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잉글랜드 역사의 실타래가 1066년에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에드워드 1세는 실제로 에드워드 4세가 되지 않았고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6세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복 후 세 번째 에드워드 국왕’은 설득력 있는 논리 없이 ‘정복 후 두 번째 리처드 국왕(리처드 2세)’, ‘정복 후 네 번째 헨리 국왕(헨리 4세)’ 등의 순으로 의회 기록보관소에 등재되었다. 앵글로색슨의 잉글랜드에는 리처드 국왕들이나 헨리 국왕들이 없었기 때문에 명확한 접미사는 불필요했지만 이는 튜더 왕조 시대까지 고정된 형태가 되었다.
웨식스 왕조 |
대 에드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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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왕 에드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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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왕 에드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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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왕조 초대 : 윌리엄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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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조 ※ |
에드워드 1세 |
에드워드 4세 |
에드워드 2세 |
에드워드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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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
에드워드 6세 |
※ 윌리엄 1세의 친손녀인 마틸다[‘잉글랜드 여군주’]의 혈통과 계승권을 물려받은 왕조.
이 번호 매기기 시스템이 선택의 문제였다는 점은 프랑스 국왕들이 사용했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관행은 후세 사람들이 프랑스 최초의 국왕으로 간주하는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부터 루이라고 불리는 국왕의 번호를 매기는 것이었지만, 만약 카페 왕조의 등장으로 번호 매기기가 다시 시작되면 우리가 루이 6세라고 부르는 국왕은 루이 1세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루이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카롤링거 통치자는 앵글로색슨의 에드워드 국왕들과 같이 흐릿한 과거에 맡겨지게 된다.
카롤링거 왕조 |
경건왕 루이 (루이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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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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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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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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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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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 초대 : 위그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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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 |
루이 6세 |
루이 1세 |
루이 7세 |
루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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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8세 |
루이 3세 |
정복왕 윌리엄은 자신을 앵글로색슨의 마지막 국왕인 참회왕 에드워드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내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세 후기 후손들은 정복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1099년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설립된 십자군 국가의 통치자인 예루살렘의 국왕들은 더욱 솔직했다. 초대 국왕인 보두앵 1세는 현대 역사책에서 알려진 대로 자신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라틴 그리스도교국(Latinitatis)의 예루살렘 사람들의 국왕’이라고 표현했으며, 따라서 그의 영역의 서부 및 식민지 뿌리를 강조했다. 이후의 국왕들은 비슷한 형태를 사용하여 보두앵 1세의 차례대로 자신의 위치에 따라 번호를 매겼다, 따라서 보두앵의 후계자인 보두앵 2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 라틴인의 두 번째 국왕’이었고 그의 후계자 풀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 라틴인의 세 번째 국왕’이었다. 동일한 개인 이름의 반복은 이와 관련이 없으므로 ‘보두앵 4세’라고 명명된 국왕은 자신의 문서에서 ‘여섯 번째 국왕’이었다.
보두앵 1세 |
‘하느님의 은총으로 라틴 그리스도교국의 예루살렘 사람들의 국왕’ |
보두앵 2세 |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 라틴인의 두 번째 국왕’ |
풀크 + 멜리장드 ※ |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 라틴인의 세 번째 국왕’ |
보두앵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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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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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
‘여섯 번째 국왕’ |
※ 멜리장드는 보두앵 2세의 장녀이자 계승자로 남편 풀크와 공동으로 등극했다. 풀크가 첫째 부인에게서 낳은 장남 조프루아 5세가 ‘잉글랜드 여군주’ 마틸다와 결혼하여 헨리 2세를 낳았고, 둘째 부인인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삼남과 사남이 보두앵 3세와 아모리이다.
노르만 정복 당시부터 국왕을 세는 아이디어는 공식적으로는 에드워드 3세에게서 등장했지만, 그 이전 13세기 초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찾을 수 있다. 13세기 중엽에 활동한 세인트 알반스의 유명한 미술사학자 매튜 패리스는 정복 이후 8명의 국왕을 묘사하면서 ‘정복왕 윌리엄, 정복 후 잉글랜드의 첫 번째 국왕’이라고 표기했고, 매튜의 동시대 왕인 헨리 3세[에드워드 1세의 부왕]까지 이 스타일을 이어받아 ‘헨리, 여덟 번째 국왕’이라고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십자군 국왕들이 사용한 시스템이다.
윌리엄 1세 |
‘정복왕 윌리엄, 정복 후 잉글랜드의 첫 번째 국왕’ |
윌리엄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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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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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vs 마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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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 청년왕 헨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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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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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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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 |
‘헨리, 여덟 번째 국왕’ |
※ 스티븐은 정복왕의 외손자이고 마틸다는 정복왕의 친손녀이다.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인 윌리엄이 난파 사고로 사망한 후 헨리 1세는 남은 유일한 적출인 마틸다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무정부 시대’라는 내전이 발생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스티븐의 왕위를 인정하도록 하되, 그 후계자는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되었다.
※ 헨리 2세는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대관시켰다. 그러나 청년왕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해서 별도의 번호 매기기가 없고 헨리 3세라는 이름은 존의 아들이 가져갔다.
[참고 문헌]
Robert Bartlett, 『Blood Royal Dynastic Politics in Medieval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https://www.google.co.kr/books/edition/Blood_Royal/tILoDwAAQBAJ?hl=ko&gbpv=0
중세 유럽 전역에서 수백 년 동안 군주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권력이 가족, 즉 왕조의 손에 있음을 의미했다. 그 정치는 가족 정치였다. 정치 생활은 지배 가족의 출생, 결혼 및 사망에 의해 형성되었다. 왕조 체제는 여성 통치나 왕위를 노리는 자들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왕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름, 통치자의 번호 매기기(the numbering of rulers), 문장의 시각적 표시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리고 왜 일부 왕족은 살아남아 번성했지만 다른 왕족은 그렇지 못했을까? 풍부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라틴 크리스트 국가와 동로마의 왕조 권력에 대한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이 역사는 유럽 황실과 왕실의 정치에서 가족 역학과 가족 의식이 수행한 역할을 탐구한다. 왕실 결혼과 아들의 탄생에서 여성 군주, 애인들, 사악한 숙부에 이르기까지 세인트 앤드류 대학교의 명예 교수인 로버트 바틀렛은 지배 왕조의 내부 경쟁과 충성심의 복잡한 그물을 흥미롭게 이해하고 중세 세계의 본질적인 특징을 새롭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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