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 정문 전경
샤를 10세(Charles X, 재위년1824-1830)의 왕실 마차
전투의 방 Galerie des batailles
상술한 샤를 10세가 1830년 7월 혁명으로 실각하고 새롭게 즉위한 국왕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재위년 1830-1848)에 의해 조성된 공간으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Clovis 부터 나폴레옹까지 천 년이 넘는 프랑스 군사사의 영광적인 모습들을 기록한 그림들이 전시된 화랑.
동시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넓은(길이 120미터, 너비 13미터) 방이기도 하다.
거울의 방 Galerie des Glaces
16세기 이래 유럽 궁정건축의 모범으로 동경을 사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프랑스에서 그 원숙미를 쟁취한, 베르사유 궁전의 상징적 공간. 그 화려함과 웅장함 덕에 근세 프랑스 궁정의 각종 행사장으로써 각광받아 왔었으며, 또 이 사진이 찍히기 불과 20여년 전인, 보불전쟁 직후인 1871년 독일제국 선포식이 펼쳐지기도 하는 등 프랑스의 영광과 치욕을 증언하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1686년 시암 왕국(현 태국) 아유타야 왕조에서 보낸 사신들을 접견하는 루이 14세. 1865년 자끄 에드몽 르망Jacque Edmond Leman 작.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 전쟁 패배로 무역 이권 상실을 넘어 외교적 고립에 처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항해시대 이래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방세력에 맞서 동맹을 추구하던 아유타야의 나라이 대왕King Narai The Great, Ramathibodi III(재위 1656-1688)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뤄진 사건.
1871년 독일제국 선포식 기록화, 1885년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 작.
루이 14세의 침실
레토 인공호수 Le Bassin de Latone
그리스 신화의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인 태양신Le Dieu-Soleil 아폴론Apollon의 어머니, 티탄계통 여신 레토(佛 : Latone)에게 봉헌된 인공 호수.
스스로 태양왕Le Roi Soleil을 자처한 루이 14세가 기존 루이 13세 때 만들어진 호수를 자신의 입맛에 맛게 변형시켰는데, 혹자는 레토 여신이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갓 5세의 나이세 즉위했던 루이 14세를 대신해 섭정 모후로서 프랑스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의 안Anne D'Autriche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더 나아가 섭정인 안의 노력으로 귀족세력의 반란을 극복하고 절대왕정을 거머쥘 기반을 마련한 것을 기념했다고 하나, 명확한 기록은 없어 정설은 아니다.
불의 전차를 모는 아폴론 Le char embourbé
위의 레토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과 같은 자연현상을 아폴론에 빗댄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빌려온 또 하나의 작품. 태양신 아폴론의 유년기와 권능을 묘사하여 은연 중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체성을 과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폴론의 숲 Bosquet des Bains D'Apollon
아폴론 신화의 다양한 장면들을 묘사한 곳이지만, 18세기 루이 16세에 의해 당대 유행하던 시누아즈리Chinoiserie, 즉 중국식 화원이나 영국식 정원 유행에 따라 초목들이 조성되며 루이 14세 당시의 모습은 보존되지 못했다.
그랑 트리아농 Le Grand Trianon
그랑 트리아농 전경
루이 14세의 애첩 맹트농 후작부인 Marquise de Maintenon을 위해 건설된 화려한 궁전.
나폴레옹 1세의 첫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의 침실
나폴레옹 1세의 방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방불 중 숙소였던 침실.
쁘띠 트리아농 Le Perit Trianon
쁘띠 트리아농 전경
루이 15세가 애첩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를 위해 지었지만 퐁파두르 부인 사후에나 궁이 완공 되었고, 결국 다른 후첩들이나 왕비, 황후 등이 사용한 궐 내의 작은 저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 정략결혼 차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겐 베르사유 궁전의 공적이고 압도적인 분위기, 또 그 공간에서 마주치는 프랑스 현지 왕족과 귀족 세력과의 알력다툼 탓에 사적인 생활 공간으로선 쁘띠 트리아농을 더 선호했다고 하며, 덕분에 그녀의 인간적 모습을 연구하기 좋은 여러 흔적들이 이 소궁에 남게 되었다.
벨베데레 Belvédère
쁘띠 트리아농 내 영국식 정원에 자리잡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자. 왕비의 취향에 맞는 우아하고 낭만적인 야외 음악극, 소극들이 해당 정자가 있는 정원에서 공연되었다.
낙농업품 제조소
마리 앙투아네트가 치즈, 우유같은 것을 맛보던 곳으로 유명했으며, 농가적 소박함이 묻어나오는 자못 궐 내 치곤 특이한 공간.
메종 뒤 세녀르 Maison du Seigneur
궁궐 후원에 지어진 촌락 형식의 별궁.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농가의 목가적 삶에 대한 동경 차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 지어진 전원생활 공간이다.
1674년 베르사유 궁에서 그랑 콩데 공을 영접하는 루이 14세Réception du Grand Condé à Versailles, 1878년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작.
세계사에 절대왕정의 화신으로 수 백년 동안 인류에게 기억되는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년-1715년)는 사실 즉위 직후부터 왕권의 심대한 위협을 받았다.
상술했듯이 5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국왕의 치세 초기인 유년기에, 실권은 왕의 모후 자격으로 섭정에 임하던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국의 최대 위협인, 스페인과 독일의 통치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정략결혼 차 시집 온 오스트리아의 안과, 또 선왕과 그녀의 총애를 받던 쥘 마자랭 추기경에게 주어졌는데, 마자랭은 전임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호의로 프랑스에 자리잡게 된 교황의 프랑스 특사 출신, 즉 태생적으론 이탈리아인이었다.
국왕 자체의 권력도 제한되었을 뿐더러 그 실권도 프랑스 태생이 아닌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프랑스 부르봉 궁정의 위신은 당연히 재위 내내 귀족 반란에 시달려야 했고, 또 유럽 각국의 왕위계승 문제나 프랑스의 국력 신장을 위해서도 전쟁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루이 14세의 재위기간 내에 있었다.
이런 고난을 이겨내면서, 또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루이 14세는 스스로에게 절대자적인 위상을 국내외의 왕족, 귀족, 그리고 신민 전체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고,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왕궁 중 하나가 될 베르사유 궁전 건설 사업은 그 일환으로서 적격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추종과 그리스-로마 신화의 모티프로 치장된, 당대 프랑스 기준으론 세련되었되 전통적이라기보단 이국적인 이 건물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지만, 그 웅장하고 우아한 미감은 비단 건설을 지시한 루이 14세 만이 아닌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이거나 점령자가 되었던 후세의 그 누구든 매혹시키며, 스스로의 영광적이고 황홀한 순간들을 궁전의 공간 속에서 기여하고 싶었으며, 그들의 기여는 또한 궁전의 명성을 드높이는 역사가 되었다.
부르봉 왕가나 그들과 연을 맺던 귀족 부인들만이 아닌 혁명기 프랑스의 승리자 보나파르트 가문이나, 보불전쟁의 승리자 독일 제국 또 이후에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영구히 꾀하고자 한 제 1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인 연합국,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대외적 위신과 통치 정당성, 영광을 윤색하기 위해 이 궁전을 이용했으며 궁전은 당초의 건립 목적과 달리 비단 부르봉 왕가만이 아닌 프랑스,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게도 중요하고 소중한 역사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 태생적 아름다움과 별개로 가치가 마련된 것이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거울의 방 모습.
가운데 칸 거울 앞에는 연합국 주요국의 정부수반들이 앉아있는데, 얼굴이 보이는 이들은 왼쪽에서부터
미국 대통령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 Georges Clemeneau,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그리고 가운데 등만 보이는 사람은 독일 측 대표로 조약 서명자로 나온, 바이마르 공화국 식민지장관 요하네스 벨 Johannes Bell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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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보불 전쟁의 패전으로 기존의 나폴레옹 3세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신생 프랑스 제3공화국이 집권한 이래, 1870-80년대의 프랑스는 옛 부르봉 가문의 통치를 다시 바라는 왕정복고주의자들과 드디어 공화주의가 빛을 보갰지 싶어 더욱 맹렬해진 공화주의자들, 이들 사이에서 영국식 입헌 군주주의의 도입, 또는 더 나아가 파리 코뮌의 잔챙이들까지 합세해 정쟁이 치열히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던 와중 1880년대에 스위스에서 개발된 Photochrom 기법은 1890년대에 미국 출판업계를 포함해 많은 수요를 만족시키게 되었고,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전 세계의 명소들을 생생한 색감으로, 사진 기록을 남기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기술 발전의 수혜는 베르사유 궁전 역시 혜택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890년대의 프랑스는 어느덧 혁명 1세기가 지나게 되었다. 기존의 왕정 복고파든, 보나파르트 식의 인기영합적인 군사통치자에 대한 동경이든, 대중적 지지는 사그라들고 프랑스의 공화주의나 사민주의 세력도 당시 유행이던 민족주의 사상에 기반한 원숙한 통치 동력을 확보하면서 자연스레 베르사유 궁전도 비단 봉건 구체제와 왕실의 상징이라기보단 프랑스 민족의 자랑스런 문화적 자산이란 가치성이 대두되던 시기기도 했다.
1871년 집권한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체제인 파리 코뮌 당시 진압군에 대한 방어 명목으로 파리를 장악한 좌익 폭도들이 관공서와 궁궐들에 저지른, 파리 시내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방화 행위로 영구히 파괴되고 만 파리 최대 왕궁인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과 달리, 수도 외곽에 있던 베르사유 궁전은 다소의 변형은 거쳤을 지언정 루이 14세 이래의 우아함을 간직한 채 다행히도 그러한 비극을 피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근대 사진 기술의 발전과 정치적 안정 덕에, 프랑스를 넘어 인류의 존엄성과 자긍심에 기여를 해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서, 베르사유 궁전의 오래 전 모습은 지금도 보존되게 되었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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