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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3 01:03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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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history-20230920-215025-000-resize.pn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폰페이[포나페]는 오늘날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 중 하나로, 1919 - 45년 동안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다. '난마돌'로 유명하다.]

 

태평양 전쟁 동안 폰페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고, 폰페이인들은 무슨 일을 겪었는가?

 

이 기간의 정보는 주로 연합국 문서에 기반하며, 전략 계획, 날짜 및 공격 대상, 일본의 활동과 같은 일부 데이터로 한정될 뿐 폰페이인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그러나 폰페이인들이 태평양 전쟁에 크게 연루되고, 전쟁을 자신들의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주했음은 확실하다. 그 증거로 1980-81년에 폰페이의 '키티' 부족의 영역인 WENE에서 살았던 연구자는, 그가 머무는 동안에도 여전히 가정의 일상 생활에서도, 저녁의 친구들끼리 모이는 비공식적인 모임에서도, 나이 든 남녀가 토론할 때도 전쟁은 주요 주제였으며, 라디오를 통해 전시 노래가 방송되고 있었다.

 

또한 하와이에 살고 있는 폰페이인 사이에서는 유명한 가수, 밀스 산토스의 노래인 KIHT KOROS ME EPWIKI는 전쟁 중 폰페이인들의 속요를 가요화한 것인데 전쟁 중 폰페이인들이 겪은 고통을 가사로 담고 있다. 이 노래는 2000년대까지도 폰페이인들 사이에서 불리고 있으며 구전을 통해 역사를 전달하는 섬의 전통을 생각할 때 앞으로도 전쟁은 폰페이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worldhistory-20230920-215234-001-resize.jp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일본 시대에 태평양 전쟁을 가리키던 "대동아 전쟁"에서 유래한 '타이토와'(Taytowa)는 오랫동안 폰페이에서 "전쟁"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오늘날 폰페이에서 아주 오래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유명사화되었다.]

 

연구자는 1985년 폰페이의 남녀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공유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폰페이로 돌아갔다. 폰페이인은 노래, 일화 및 개인사에서 전시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참여한 다양한 전시 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했으며 또한 그들이 전쟁을 이해하고, 느끼고, 대처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그들의 삶과 폰페이 역사의 전환점이자 분수령이 된 사건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연구자는 이 외국 전쟁의 거대한 규모, 첨단 기술로 싸운 이 전쟁과 그에 따른 빠르고 극적인 사회 변화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을 계속 형성하고 있다고 믿는다.

 

폰페이의 일본 시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이 공격을 받기 이전까지 폰페이는 27년 동안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다.

 

비옥한 폰페이는 인구 과잉의 해결과 조국의 경제적 생산이라는 일본의 초기 목표에 매우 적합했다. 코프라, 타피오카 전분, 담배 생산이 주 산업이었고, 비누, 종이를 생산하는 공장도 세워졌다.

 

중일전쟁 이후 폰페이는 제약, 섬유, 탄닌 산업 등 새로운 산업이 촉진되어 수출량이 급증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 이민이 촉진되었고, 폰페이의 일본인 인구는 1940년 7,803명으로 원주민의 수(5,866명)를 능가했다. [폰페이는 사이판과 팔라우 다음으로 일본인이 많이 정착했다.]

 

결과적으로 폰페이는 다른 태평양 섬처럼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린다. 전쟁 전까지는 말이다.

 

worldhistory-20230920-215702-003.jp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worldhistory-20230920-215700-002-resize.jp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전쟁 전 폰페이의 콜로니아, 마치 일본의 마을을 보는 듯 하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태평양 전쟁 시작 후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할 목적으로 섬의 경제 생산이 증가했다. 군사 건설 프로젝트(예: 지상 통신 및 레이더 설치, 방어포 배치, 블록하우스, 대피소, 수상 비행기 기지 및 2개의 작은 활주로)도 시작되었다. 이 시기 폰페이 사람들은 다양한 전시 프로젝트에 고용된 민족 중 하나였다.

 

처음에 폰페이인의 참여는 자발적인 임금 노동 기반이었다. 남자들은 건설 프로젝트와 농장에 일하러 갔다. 일부 여성들도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그리고 약간의 모험과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밭으로 일하러 갔다.

 

일부 남성은 일본군에 자원하여 라바울로 이송되었다. 1942년 7월, 폰페이에서 20명(당시 존재하는 4개의 주요 마을에서 각각 5명)이 자원하여 라바울의 원주민 노동자들을 감독하기 위해 보내졌다.

 

1943년 7월에 또 다른 179명의 폰페이 병사들이 모집되어 쿠사이에(오늘날의 코스라에)로 보내졌다. 이 사람들은 모두 폰페이 키티의 추장 출신이었고 폰페이의 모든 원주민들을 대표했다. 키티 여성들은 가족, 농장, 지역 사회를 돌보기 위해 남겨졌다.

 

1944년의 사건은 폰페이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변화시켰다. 연합군은 Enewetak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기 전에 Pohnpei를 "폭격"한 다음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섬을 "폭격하고 우회"하는 과정은 들리는 것처럼 순진한 행동이 아니었다.

 

폰페이 주민들은 2월 초에 섬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연합군 항공기 몇 대를 본 것을 회상했다. 며칠 후 폭격이 시작되었다. 연합군 보고서에 따르면 타라와에 기지를 둔 7공군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42대가 폰페이를 공격했다. 2주 안에 5번의 연합군 공습은 총 118톤의 고폭탄과 6000개 이상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그런 다음 5월 1일 6척의 미국 전함(로와, 매사추세츠, 뉴저지,앨라배마,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이 항구 도시와 콜로니아의 일본 식민 본부를 포함한 섬 북부 지역을 포격했다.

 

모든 공군 기지가 파괴되었고 콜로니아의 940개 건물 중 약 75%가 무너졌다. 게다가 선적도 사실상 차단됐다. 폰페이의 새로운 목표는 필연적으로 자급 자족이 되었다. 폰페이 사람들은 이 때부터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일본 요구의 수준과 가혹성, 통제의 엄격성이 극단적으로 증가했다.

 

키티의 모든 성인 여성들은 그 때부터 다양한 농업 프로젝트에 일하도록 징집되었다. 노동력에 합류한 여성들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오랜 시간을 보냈다. 휴일은 격주 일요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완전히 없어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부 노동자들은 심지어 건물에 갇히게 되었고 방문객은 물론 자신의 자녀도 만날 수 없었다.

 

남겨진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농장은 방치되어 있었고 농산물 소비는 일본인에 의해 엄격하게 감시되었다. 많은 키티 여성들이 처음에는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Sokes 족장의 농지에서 일했다. 나중에 일부는 남부 Madolenihmw 지역의 담배 밭에서 일했다. 농경지에서의 생활 여건은 열악했고 일은 험난했다.

 

연합군은 일본군의 급속한 재건 노력을 막기 위해 반복적으로 섬을 폭격했다. (Denfield [1979]는 1944년 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250회의 공습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Sokeh의 논에서 일했던 한 키티 여성은 비행기의 도착으로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이 여성은 오전 5시에 작업을 시작했다. 비행기가 오전 8시에 도착하면 노동자들은 벙커에 숨어 아침을 먹었다. 알람이 다시 울리면 그들은 다시 일하러 갔다. 그러나 때때로 비행기가 시간을 맞추지 않고 도착했다.

 

이 여성은 은신처로 도망치려 할 때 두려움에 떨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녀는 탈출 시도를 포기하기 시작했으며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들판에 누워있었다고 말했다. 몇 번의 실수 후에 친절한 일본 감독관이 그녀를 주방일에 배정시켰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녀는 안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그녀가 방금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총격이 가해졌다.

 

일본 정부와 폰페이 사람들의 극단적인 노력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당시 폰페이는 옷감 부족이 심했다. 어떤 사람들은 낡은 손수건, 스타킹, 심지어 병원용 거즈로 옷을 만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실내에 머물렀고 밤에만 외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페이는 다른 태평양 전장과 달리 전쟁 중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경험하지 않았다.

 

3525444.jp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폰페이에 남은 일본군 전차]

 

외부의 폰페이인들

다시 돌아와서, 라바울로 간 폰페이인들을 떠올려보자. 유감스럽게 그들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라바울로 보내진 20명의 폰페이인 중 단 3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또 코스라에 건설 노동자로 보내진 키티 남자들(일본인, 오키나와인, 한국인 및 키리바시 원주민과 같이)도 1944년 폭격이 시작된 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2월 미국 항공기 4대가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고 창고, 활주로 및 기타 군사 건물을 파괴했다. 이 사건이후 추크에서 수많은 지원군을 실은 일본의 3척의 대형 선박이 코스라에에 파견되었다. 추크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은 추가 수송을 방해하여 이 선박들을 효과적으로 좌초시키고 보급을 차단했다. 코스라에에서 식량 공급이 매우 부족해지자 농장을 세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코스라에에 사는 사람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이 섬은 일본의 태평양 점령지 중 가장 많은 민족이 살던 지역이었는데 일본인과 코스라에인, 폰페이인 외에도 건설 노동자로 한국인, 오키나와인, 전쟁 포로로 키리바시인, 나우루인, 투발루인까지 있었다.

 

그래서 엄격한 배급이 시작되었고 곧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다른 방어적인 군사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으며 휴식 없이 밤낮으로 작업이 계속되었다.

 

일본은 계층적 순위에 따라 코스라에에 있는 서로 다른 문화 집단에 서로 다른 식품을 할당했다. 모든 큰 물고기와 대부분의 단백질 공급원을 포함한 최고의 음식은 일본인에게 돌아갔다. 키리바시인들은 전 영국 신민이었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여겨졌기 때문에 식량 배급에 있어 가장 마지막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폰페이 사람들이 그 사이에 있었다. 처음에 폰페이 남성들은 빵나무 열매와 코코넛을 먹게 되었는데, 둘 다 그들의 전통적인 식단에서 중요한 음식이었다. 키리바시 원주민에게는 토란만 주어졌다.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폰페이 사람들에게 키리바시인이 먹던 토란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키리바시 원주민은 덜 자란 몇 개의 작은 감자가 배급됐고 최종적으론 감자 잎으로 요리한 수프가 배급되었다.

 

많은 키리바시인이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일본군조차 상황이 좋지 않았다. 키티의 남성은 "막대기"처럼 되어버린 일본군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회상한다. 코스라에로 보내진 179명의 폰페이인 중 10명이 사망하고 169명이 폰페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Kiht koaros meh epwiki isiakan duemen

(우리는 모두 179명)

Pahmen pwurewei wenemen mehla

(6명은 죽고, 4명은 돌아갔습니다)

Ansou me se lel pohn sahpwo epwelen mwenge laud

(육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음식이 부족했어요)

Pohn sahpwo mehn pohnpei kan kangada wahn nihn

(폰페이 사람들은 닌의 열매를 먹었어요)

Apwal laud me mie sohte sawas perail

(힘들지만 아무도 서로 도울 수 없어요)

Inenen duhpekla KUSAI

(쿠사이에선 너무 배가 고파요)

 

[KIHT KOROS ME EPWIKI의 가사]

 

b60353a2c39e40d5d3146192aad8ced8.jpg 폰페이와 태평양 전쟁

(폰페이의 버려진 일본 전차)

 

전쟁의 교훈

"전쟁은 가장 큰 고난이다"는 폰페이 남녀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겪은 경험을 요약하기 위해 반복해서 사용하는 문구이다.

 

사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볼 때 폰페이의 전시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육지에서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전쟁 중 사망한 폰페이인은 소수였으며, 섬의 폰페이인들은 극단적인 식량 부족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페이인들이 전쟁 중 겪었던 고난은 그들이 이전까지 겪었던 그 어떤 고난보다도 규모가 큰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에서 이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어렵다고 말한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사건의 기억에 몸서리를 치거나 휴식을 요청하거나, 인터뷰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태평양 전쟁이 폰페이인에게 미친 영향과 교훈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연구자는 제2차 세계 대전 경험으로 인해 폰페이 사람들이 전통의 강점과 약점을 성찰하고 외부인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첫째로, 폰페이의 전통적인 성별 구별이 흐려지고, 수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나타난다. 근면한 일꾼이자 맹렬한 전사로서의 역할을 자랑해 온 폰페이 남성들은 첨단 기술로 이뤄진 외국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의 한계에 직면했다. 외부로 파견된 키티 남성들은 폭격이 시작되고 극심한 긴장, 외로움, 두려움에 시달렸다. 어떤 사람들은 외출조차 두려워하거나 식사를 못하기도 했다.

 

반면 폰페이 여성들의 전시 경험은 폰페이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별 제한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폰페이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세대의 키티 여성들은 직장과 정치에서 전통적인 성별 경계를 넘어선 것으로 유명하고 미국 통치 하에서 여성의 역할이 더 많이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두 번째로, 폰페이가 외국과의 관계와 세계의 맥락에서 폰페이의 역할의 성격과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국인과의 접촉 이후 150년 동안, 포경선원, 선교사, 무역상 등의 다양한 외국인들을 만났고,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폰페이의 추장들은 외국인을 이용하여 전통 질서 내에서 자신들의 위신을 높여 왔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시대를 거치면서 폰페이인들은 일본 정부에 종속 되었고 군사 위협의 상황에서 이러한 성향이 더 강해졌다. 폰페이의 전통은 점점 격하되었고, 섬에서 폰페이인들은 "주변인"이 되었다.

 

스페인이나 독일과 달리 일본은 미크로네시아에 대해 매우 확고한 통치력을 지녔고, 전쟁 전 폰페이인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발발 직후에 폰페이인들은 처음에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흥분"했다고 회상했다. 전통적인 폰페이 관습에서 전쟁은 남자의 관습 중 하나였고, 폰페이인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강하다고 믿었다. 더욱이 일본의 선전으로 폰페이인은 어리석은 미국이 결코 자신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 비행기가 처음 폰페이에 도착했을 때 총격은 종종 정글이나 바다를 향했다. 당시 정교한 전쟁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국의 무능력함은 폰페이 농담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폭격이 시작되자 폰페이인들은 전쟁의 거대한 규모를 느끼기 시작했고, 점점 일본이 패배할 가능성을 생각했다.

 

폰페이인은 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보복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일부 일본 군인은 폰페이인들의 곤경에 동정을 표하면서도 단 한 명의 원주민도 미국의 포로가 되도록 두지 않겠다(즉 포로가 되기 전에 죽여주겠다)고 경고했다. 곧 일본이 벙커에 모여 있는 원주민을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폰페이 남성들은 일본의 명령에 따라 폭격 대피소를 건설하면서 비밀리에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 역시 노래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분명히, 폰페이 남녀 모두 2차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일본의 전쟁 준비를 도왔다. 그러나 폰페이인은 결국 자신들의 운명이 일본과 연합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현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전쟁 중 겪은 고난은 외세의 지배와 종속이 낳은 극단적인 결과였다.

 

전쟁 이후 폰페이인들은 자신들의 지리적 가치에 대한 전략적인 인식을 높였고, 그것을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파악했다. 분명히 앞으로 폰페이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외국의 손에만 맡기지 않을 것이다.

 

출처

Lessons of War from Pohnpei, Suzanne Falgout -> 대부분의 내용은 해당 번역

 

The Typhoon of War, Lin Poyer • Suzanne Falgout • Laurence Marshall Carucci 

 

시게타 타츠로의 폰페이 섬 체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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