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왔을 때, 일본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루키 작품의 문학성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이 소설에 난징 대학살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쪽의 질타는 굉장했다. '노벨 상을 받기 위해 중국 쪽 지지를 얻기 위해 조국을 팔았다'라는 강도 높은 비난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소신을 지켰고, 앞으로도 잘못된 과거사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근데 이런 의문이 들긴 한다. 왜 굳이 난징 대학살이었을까?
사실 하루키가 처음부터 이런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의 '감정'에 더 집중하는 작가였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하루키 붐'을 일으킨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당시 한국의 90년대 학번들에게 하루키는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히트를 쳤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 좌익 운동의 절정이었던 68학번 출신이고 이 소설 또한 시대적 배경이 그때의 시기인데 사회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개인에 너무 집중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항상 개인에 중점을 두던 그의 소설은 하루키가 여러 국내외 사건들을 겪게 되면서 점차 사회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항상 고독한 '나'를 다루던 하루키는 걸프 전쟁의 모습과, 1990년대 중후반 일본을 뒤흔든 옴진리교 사건을 겪게 되면서 자신의 작품 노선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동안 무심함(detachment)를 중요시했던 그의 작품은 책임감(commitment)을 중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에 옴진리교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기도 하고, 2009년 예루살렘의 시상식에 참여해서 상당히 강력한 발언을 하는 등 작가가 사회에 가져야 할 책임감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따라서 <기사단장 죽이기>도 이와 같은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일종의 고백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시리즈를 출간한 다음 2019년 5월에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 에세이는 그동안 하루키가 다루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을 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회상하는 내용이 주가 되는데, 그 중 가장 독자들의 눈을 끌었던 것은 아버지가 하루키가 어렸을 때 자신이 속했던 부대가 중국인 포로를 군도로 목을 자르면서 처형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줬다는 대목이다.
이는 하루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내가 가해자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은 하루키를 괴롭혔다. 그래서 하루키가 성장한 다음에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작가가 된 이후에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2008년에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만나서 화해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하루키는 그동안 아버지의 과거를 마주하지 못했던 공포를 딛고,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하루키의 아버지는 난징 대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난징 대학살을 벌인 부대에 10개월 뒤에 보급 담당 부대로 배속되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고, 중국인 포로를 처형하는 모습은 전쟁 중에 목격한 것일 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하루키의 오해는 풀렸다. 이제 자신의 짐도 덜었고, 이대로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난징 대학살의 이야기를 밝혔을까.
하루키의 아버지는 하루키가 어렸을 때 포로 처형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전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승려를 지망했던 그에게 전쟁은 큰 상처로 남았을테니까. 그러나 하루키에게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 어두운 역사가 묻히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그 뜻을 잇기 위해서 계속 어두운 과거사를 피해자의 입장으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어떤 나라든지 어두운 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이를 인정하며 반성하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의 난징 대학살 언급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하루키의 개인사를 고백한 소설이었다. 이제 가족의 그림자까지도 받아들인 이 위대한 작가의 다음 소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까.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는 광대한 대지로 떨어지는 엄청나게 많은 빗방울 가운데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