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훤칠한 청년의 이름은 피터 페히터(Peter Fetcher)입니다. 1944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동베를린 지역에서 벽돌공 일을 하던,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가족들은 다 동베를린에서 살았지만 장녀만 서베를린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래도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가족이 만나는 것 자체는 어렵진 않았으나
하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이제 피터에게 서쪽의 누나를 만날 길은 물리적으로 봉쇄되어 버린 것, 한순간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피터는 최후의 희망으로 회사에 서베를린 여행 신청서를 냈지만 단번에 거절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저 가증스런 장벽을 뛰어넘는 것 뿐이었다.
마침 절친한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Helmut Kulbeik)가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겠다고 합류했고, 장벽이 세워진지 딱 1년이 되는 날인 1962년 8월 17일에 작전이 시작된다
피터와 헬무트는 장벽에 거의 붙어있는 건물 유리창에서 뛰어내려 벽을 넘고자 했으나,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챈 동독 국경수비대는 즉시 발포
다행히 헬무트는 무사히 벽을 넘는데 성공했으나, 피터는 벽을 바로 앞에 두고 총에 맞아 쓰러져 버렸다.
장벽 바로 앞에서 총을 맞은지라 서베를린 시민들도 피터의 참상을 그대로 볼 수 있었으나, 동독군이 철통같이 장벽을 지키고 있어 그를 구할 수단은 없었다.
서베를린 사람들이 피터를 위해 해줄수 있는 거라고는 지혈할 때 쓰는 붕대를 장벽 너머로 던져주는 것 뿐이었다.
그마저도 피터의 부상이 너무 심해 제대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상황이라 거의 소용없었다.
그리고 동독 측도 이렇게 죽어가는 피터에게 의사 한명 보내주지 않은 채, 그냥 길바닥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하였다.
결국 이렇게 1시간여가 지난 뒤, 피터는 장벽 바로 앞에서 어떤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게 된다.
향년 18세.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이었다.
당연히 너무 참혹한 죽음이라 이에 항의하는 서베를린 시민들의 시위도 있었고, 소련군이 탄 버스를 향해 돌을 던지는 동베를린 시민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동베를린에 남은 피터의 가족들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아버지는 슬픔을 못 이기고 얼마 못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정신병에 걸렸으며,
형제들도 직장에서 쫓겨나 슈타지의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의 명예회복은 독일 통일 이후에야 이뤄지게 된다.
그리고 독일이 통일된 뒤인 1999년, 그가 죽은 곳에 기념비 하나가 세워진다.
이 기념비에는 피터의 이름과 함께 짧은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다.
er wollte nur die Freiheit.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