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신의 옷으로 코를 막아야만 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해 악취는 끔직했다
오로지 입으로만 숨을 쉴 수 있었다. 1994년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르완다에서는 시간당 학살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그 홀로코스트나 킬링필드를 능가하는 20세기 최악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불과 100일 만에 르완다 전체 인구의 1/7인 80만 명이 죽었고, 2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물론 오늘날 르완다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평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보건환경 분야에서 유아사망률과 HIV/AIDS 감염자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르완다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르완다 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후투족과 투치족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르완다 내전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이들은 후투족과 투치족, 이 두 종족에 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르완다와 이웃나라 부룬디 전체 인구이 98%를 차지하는 후투(Hutu)족과 투치(Tutsi)족, 이 두 종족 간의 갈등은 20세기 최악의 학살을 불러왔다.
오랜 옛날부터 르완다에는 반투족 또는 '후투족'이라고 불리는 농경민족과 목축 문화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투치족이 공존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상호 간의 결혼과 교류로 두 종족 간의 차이점은 흐려졌다.
거기다 이들은 언어와 문화와 풍습도 어느 정도 공유해 이질감이 큰 다른 부족들끼리 묶이던 아프리카 여타 국가와 다르게 잘만 했으면 이들은 하나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르완다는 벨기에 식민지 시절을 겪으며 두 종족 간의 차이와 불신 그리고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95년부터 1962년까지 르완다는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독일제국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전을 하게 되면서, 1916년부터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벨기에는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신분증 제도'를 시행하였다. 벨기에는 1933년과 34년도 사이에 르완다의 모든 국민들을 '투치, 후투, 트와족'으로 분류한 후, 종족이 명시된 신분증을 발급했다.
10마리 이상의 소를 가진 이들은 투치족으로 분류했다.
10마리 미만의 소를 가진 이들은 후투족으로 분류했다.
코가 더 높거나, 피부색이 더 옅은 이들은 투치족으로 분류했다.
코가 낮거나, 피부색이 더 어두운 이들은 후투족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해온 이 두 종족을 외모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벨기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르완다 사람들을 분류했다. 그렇게 르완다는 인구의 85%가 후투족, 14%는 투치족으로, 남은 1%는 트와족으로 분류되었다. 신분증 발급 후 벨기에는 소수 인종이던 투치족을 르완다의 지배계급으로 내세웠고,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사회경제적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벨기에가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내세운 이유는 당시 서양인들에게 투치족은 우수한 종족이라는 선입견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르완다를 방문한 영국인 인류학자 존 해닝 스피크(John Hanning Speak)는 투치족을 높은 왕족 출신의 종족이며, 유럽인들처럼 코가 높고 키와 체격이 크다는 이유로 이들을 똑똑하고 우수한 종족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이들이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이라며 더더욱 치켜세웠다.
소수에 불과하던 투치족은 하루아침에 지배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벨기에를 뒤에 업고 후투족에게 강제 노동정책과 무거운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피부색이 더 검다는 이유로 후투족을 차별했다. 인종차별적인 정책과 무거운 세금은 곧 배고픔을 불러왔고, 많은 후투족이 나라를 떠나거나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감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식민지 지배를 겪으며 후투족과 투치족, 두 종족 간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벨기에로부터의 독립 직후 후투족은 수적 우세를 내세워 권력을 차지하였다. 지배계급이 순식간에 뒤바뀌자 마자, 후투족은 투치족은 외래민족이며 이들을 외국으로 추방하거나 절멸(絶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후투족은 투치족보다 위대한 종족이 되었다. 후투족은 투치족과 결혼해서도, 그들을 고용해서도, 동정을 해서도 안 된다는 조항이 생겼다. 극심한 탄압으로 1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살해되었고, 33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이웃나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 르완다 제3대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 )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은 1973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 직에 오른 하뱌리마나(Habyarimana)는 전 정권과는 달리 투치족과의 화해와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투치족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하나 내세웠다. 바로 후투족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투치족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서로 뿔뿔히 흩어져있던 투치족들은 르완다 애국 전선(RPF)을 결성하여, 반격에 나선다. 그러나 후투 정권을 지지하던 프랑스와 벨기에가 자국 교민 보호를 이유로 개입하였고, 3년 뒤 UN의 개입으로 르완다 애국 전선을 포함한 투치족의 국내 복귀를 조건을 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평화 협정을 채결이 1년이 지나지 않은, 1994년 3월 6일 반군과 평화회담을 하고 돌아오던 줴베날 햐바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의 암살은 어렵게 채결된 협정이 순식간에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후투족 우익단체이자 극단주의자들로 이루어진 후투파워(Hutu Power)라는 이름의 정당은 사건 직후 바로 라디오와 TV 등 각종 미디어들을 통해 투치족을 향한 비방 여론을 형성했다. 거리와 도로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신분증을 검사하였고, 후투족이 아닌 다름 민족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학살이 시작되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투치족을 찾아내어 죽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민간인이 학살에 동참했다. 마체테와 창, 돌, 망치 등 일상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란 도구는 죄다 투치족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100일간이었다. 100일간 르완다 전체 인구의 1/7인 약 80만 명이 희생되었다.
하루 평균 8만 명이 죽은 것이다.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희생자의 90% 이상이 투치족이었다. 남은 10%는 후투족 온건파나 그들의 친인척 혹은 정부 관리들이었다. 르완다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이 학살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에 몸에 돌을 넣어 강에 던지기도 했다. 시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케냐의 빅토리아 호수까지 떠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르완다 학살의 참상을 말해 주는 일화 중 하나로 후투족 민병대에게 마체테로 난도질당하던 투치족 소년이 울부짖으며 "다시는 투치 안 할게요! 살려 주세요!"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너무 어려서 투치가 뭐고 후투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도륙된 것이다.
끔찍한 참상이 계속 들려 옴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침묵했다. 벨기에의 군사적 개입 요구에 미국, 영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프랑스는 후투족 학살을 사실상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초반에는 유엔과 국제사회는 르완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학살이 근거 없는 루머일 뿐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르완다 내전은 국제사회와 UN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 작중 벨기에 회사의 소유인 밀 콜린스 호텔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배우: 돈 치들)가 기자 잭(배우: 호아킨 피닉스) 이 후투족 민병대가 투치족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광경을 촬영한것이 전세계 뉴스에 보도되면 참극은 끝날거라고 낙관하지만 이미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을 기자로써 알고 있을 잭의 답변은 그렇지 않았다 )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르완다를 떠나야만 했다. 피란민들은 손에 들 수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양손에 가득 들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 수가 무려 150만 명에 이르렀다.(최대 200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르완다 내전 당시의 난민 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숫자였다. 난민 행렬에는 학살을 저지르고 도망가는 이도 있었다.
( 르완다 공화국 제6-8대 대통령 , 폴 카가메 )
르완다 내전을 종식시킨 이들은 국제사회도, 유엔도 아닌 투치족 출신에 '폴 카가메(Paul Kagame)가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이였다. 100일 간의 대학살의 주도자였던 후투족 강경파와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함웨 내부에서는 계속되는 학살에 회의감을 느끼거나, 조직에 반발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는 곧 결속력과 사기의 저하를 불러왔고, 이 무렵 르완다 애국 전선은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비슷할 무렵 마침내 국제사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르완다의 후투 파워 정부를 외교 관계 대상에서 제외하는 하면 워싱턴에 있던 르완다 대사관을 폐쇄했다.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 전선의 연이은 공격과 승리는 많은 후투족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7월 13일 반군은 햐바리마나 (전) 대통령의 옛 본거지인 루헨게리를 장악했고, 그 후 이틀 동안 50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이 국경을 넘어 자이르 공화국(현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 지역으로 도망쳤다.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한 후투족 강경파또한 대대적인 소개작전을실시했고, 100만 명이 넘는 후투족 난민 속에 섞여 이웃나라인 탄자니아, 부룬디, 자이르 공화국 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7월 18일, 르완다 애국전선은 자신들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다.
30년이 더 넘은 이야기이지만 르완다 대학살의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있다.
그러나 르완다 학살은 가해자들의 처벌이 상당히 제한됐다.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 중 대다수가 평범한 후투족들이었고,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 르완다 인구의 거의 1/3 정도로 추산되는데 수치가 이 정도 되면 처벌하고 싶어도 처벌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들을 일일이 잡아다 처벌하면 기껏 봉합했던 르완다가 다시 내전으로 분열돼 영영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학살 이후 르완다의 대통령이 된 폴 카가메는 본인이 투치족 출신임에도 국가 통합을 위해 대부분의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테오네스트 바고사라, 베르나르 투야하가, 펠리시앵 카부가 등 주도자 몇 명을 제외하면 그낭 조용히 관용을 베풀고 넘어갔다.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과거의 참혹한 모습을 찾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와 박물관에 가면 당시의 끔찍했던 이야기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고층건물과 호텔들이 들어서고, 이전처럼 사람들은 환하게 웃기 시작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