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 영토인 대마도는
연간 수십만명의 한국인이 가볍게 방문하는 곳이다.
반면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를 방문하기에는 접근성이 매우 좋지 않아서
코로나 전에는 대마도 방문 관광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일 정도였고
이렇게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곳이다보니
관광 수입도 상당했지만 여러가지 일들이 벌여져서
코로나 전에는 이렇게 한국인들은 오지 마라고 혐한하는 업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보통 이렇게 혐한이 짙은 세대들은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이 정체된 반면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상승하는 것을 겪은 40대, 50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혐한을 한다고 해서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의외로 대마도에서는 여든이 넘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반한 감정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다.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인데
이러한 특수성은 역사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공보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마도는 우리것'
사실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도 대마도는 일본땅이라고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대마도를 되찾아야 할 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전쟁 이전 한국 정부는 대마도 반환을 수십차례 주장하였으며,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있던
주권을 가지지 못한 일본, 특히 대마도 주민들에게는
한국이 언제라도 대마도를 침공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더 이상 공식적으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유야무야 되었지만.
전쟁중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반일감정이 사그라든 건 절대 아니었다.
공산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미국이 일본인들을 참전시키려고 하자
대통령부터가 공산군에게 겨눈 총을 돌려서 일본인들부터 쏴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가 되고
미국이 일본을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본에게 주권을 돌려주는 내용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해당 조약이 발효되면
전쟁 중으로 풍비박산난 한국의 국력으로는
한일관계에서 한국의 국익을 지킬 수 없을 것을 걱정하여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
다음과 같은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한다.
즉 이렇게 빗금친 지역은 전부 대한민국의 영해이므로
대한민국의 허가 받고 배를 띄우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일본과의 협의 따위는 없었고
일본 입장에선 자신의 바다라고 생각한 동해에 대해
대마도 북쪽, 서쪽으로는 배도 띄우지 말라는 식으로
이렇게 멋대로 영유권을 주장한 점에 대해 극렬히 반발했다.
그렇게 일본은 극렬히 반발했지만,
근데 그래서 뭐 어쩔건가.
아직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기 전이어서 주권이 없는 상태였고
이걸 중재해야 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제 짐 싸서 돌아가는 판이었기에
일본의 극렬한 반발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애초에 한국 정부가 일본을 물먹이기 위해 타이밍을 각 재고 있다가 터뜨린 것이었기에
한국 정부는 평화선을 근거로 일본 어선들을 '철저하게 단속' 하였다.
당시 한국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긴 했지만
어차피 공산군측 해군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증발한 상황이었기에
대한민국 해군은 평화선 근처를 순찰하다가 일본 어선이 보이기만 하면
위의 사진처럼 다짜고짜 '니들은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했다' 라며
다짜고짜 나포해서 일본 어민들을 복날 개잡듯 패버린 다음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한 니들의 죄를 시인해라' 라는 문서에
답정너 식으로 몽둥이 찜질을 하며 서명을 받아냈다고 한다.
당시 대한민국 해군과 해안 경비대들이 이런식으로
평화선 근처에 있기만 하면 다짜고짜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고
어민들을 반쯤 죽여놓을 때까지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일본 어민 중에서는 대한민국 해군만 보이면
정선 명령 불응하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순순히 정선한 이들도 반쯤 죽여놓은 상황에서
정선 명령에 불응한 이들은 대개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대한민국 해군이 '저 새끼들은 뒤가 구려서 도망가는 거다' 라며
다짜고짜 함포를 날려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인권 개념이 발달한 오늘날 입장에선
북한이나 조폭 집단들도 아니고 무슨 막가파냐고 경악할 일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는 좋게 말해 상남자식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북한처럼 뒤가 없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막무가내에 기겁한 일본이 항의하자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영해를 침범한 선박이 정선명령에 불응하고 도주하면
이를 격침시키는 게 국제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 치는 상황이었다.
사실, 태평양 전쟁 시기를 겪었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어디서 더러운 조센징들이 천황 폐하의 배에 타려고 하느냐!' 라며
일본 해군에서 조선인은 수병으로도 태우지 않았을 정도로
극심한 차별을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일본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고
어떻게든 껀수를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조지는 게
애국이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영웅담처럼 떠들어대던 시절이었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속 시원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대한민국은 오늘날 북한마냥
이렇게 나포한 선박들은 돌려주기는 커녕
적성국 재산이라면서 국고로 몰수했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정부에서 요긴하게 써먹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수산업 발전을 위해 민간에 불하하곤 하였는데
그 수가 400척에 이르렀다.
그리고 붙잡은 일본 어민들은
일본 정부가 제발 풀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하염 없이 수용소에 처넣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인권 의식이 그다지 충실한 편도 아니었고
전쟁으로 인해 자국민도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적성국의 국민이었던 일본 어민들에게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대우했었고
이러한 수용소 생활에서 죽어간 일본 어민들이 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평화선 때문에 피해가 컸던 대마도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이승만이나 한국 정부에 대해 악마 같은 놈들이라고 치를 떤다고 한다.
물론, 일본이 주권이 회복되고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이 생기면서
더 이상 동해는 대한민국 해군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긴 했지만,
당시 반일감정이 넘쳐흐르던 상황이라
대한민국 해군과 해상자위대/해상보안청 선박이 대치하게 되면
대한민국 해군이 다짜고짜 함포부터 쏘려고 해서
광기에 오금이 저린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은
평화선 안쪽으로 진입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려고 들었기에
실제로 위 사진처럼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 선박이 공격당한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대한민국 해군과 대치할 엄두를 내지 못한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은
그저 일본 어선들이 평화선을 넘지 않도록 평화선 밖에서 계도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고,
비록 당시 국제법적으로 영해로 인정받는 범위가 3해리 정도였음에도
일방적으로 영해로 60해리를 그어버린 평화선 자체는 영해로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평화선으로 선포한 영역이 거의 그대로 클라크 라인이나
전후 미국이 설정해 준 한국 방공식별구역으로 편입된 것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포가 국익 수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