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년, 얀 드 두트라는 한 네덜란드인은 방광 결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대장장이였으며, 방광 문제를 오래 겪어왔고, 석공에 의해 방광에서 결석을 제거한 경험이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 그때 석공의 경험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다시 그런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고, 그는 다시 석공을 받거나 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살을 도려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라고 결심하고 스스로 수술을 준비했다.
그는 아내를 수산시장으로 보내고 자신의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형제에게 자신의 음낭을 한 쪽으로 민 뒤 왼손으로 매우 큰 돌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회음부를 잘랐다. 그런 다음, 그는 결석이 나올 수 있도록 상처를 충분하게 열기 위해 스쿼트를 하였다. 두 손가락을 상처 속에 넣어 결석을 잡아당겨 빼냈고, 그 과정에서 방광이 찢어졌다. 돌은 바닥에 떨어졌고, 얀 드 두트는 그때서야 치료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형제에게 치료사를 부르라고 말했고, 치료사는 상처를 꿰매고 단단히 묶어주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얀 드 두트는 그 사건 이후 최소 5년을 더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야기는 1672년에 쓰인, 230건의 의료 사례를 자세히 다룬 <Observationes medicae>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돌의 무게는 113g였고 암탉 알만한 크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얀 드 두트가 결석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계속 읽어보자!
네덜란드는 얀 드 두트가가 해낸 일에 매료되었다. 얀 드 두트 역시 자신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돌을 금으로 세팅하여 간직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들려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655년 카렐 판 사보얀이라는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서 그는 당시 시술에 사용했던 돌과 칼을 들고 있었다. 이 그림은 현재 레이던 대학교 병리학 연구소에 걸려 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얀 드 두트가 이야기한 대로 그런 일이 정확히 일어났는지 의구심을 가진다. 앞서 언급한 <Observationes medicae>조차도 상처에 궤양이 생겼을 것이며, 얀 드 두트가 한 손으로 결석을 빼내고 적절한 도구 없이 결석을 꺼낼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고 언급하고 있다. 1969년, LJT Murphy라는 한 연구자는 드 두트가 방광에서 결석을 제거하는 게 그렇게 쉬웠을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 대신, 그는 두 개의 결석을 제거하기 위해 이전에 했던 수술에서 남은 흉터를 통해 결석이 빠져나온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시사했다. 만약, 결석이 피하 조직까지 들어갔다면 드 두트가 칼로 잘라내고 손가락으로 제거하는 게 더 쉬웠을 거라는 것이다.
방광 결석은 일반적으로 훨씬 작으며, 방광을 완전히 비우지 못해서 발생한다. 전립선이 비대해지거나 신경이 손상되면 방광이 완전히 비워지지 않을 수 있다. 방광에 남아 있는 소변이 결정화되어 딱딱한 결석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얀 드 두트에게 이러한 증상이 재발한 것은, 전립선 비대증이나 염증을 유발하는 요로 감염이 치료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얀 드 두트는 아내가 수산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설명해야 할 게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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