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대구'를 놓고 벌어진 치열한 전쟁에 대해 소개해볼려고해
아 우리 대한민국의 도시 대구가 아니라 바로 위 사진의 대구(Cod)를 놓고 벌어진 전쟁에 관한 이야기야
이 전쟁에 당사자는 바로 아이슬란드와 영국(독일도 조연으로 등장함)
이 대구를 놓고 벌어진 아이슬란드와 영국 어민들의 갈등은,
무려 15C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아이슬란드가 덴마크 식민지이던 시절,
이 문제 때문에
영국과 덴마크의 군대가 대치하기도 했어
아이슬란드가 독립한 이후 이러한 갈등은 더욱 극심해졌는데,
국가수입의 95%를 어업에 의존하던 아이슬란드는 자국 근해에서 이뤄지는,
영국과 독일 어민들의 어업활동에 대한 적대감이 극심했고,
1952년 적선기준선과 어업수역을 설치하는 것으로,
아이슬란드와 영국의 치열한 어업분쟁 및, 국제해양법의 배타적 경제수역 관련 기준의 정립에 관한 서막을 알렸지
그리고 1958년 9월, 마침내 아이슬란드는 12해리의 영해를 확정하여 선포했어,
물론 영국과 독일은 이에 반발했는데,
독일이야 2차대전에서 해놓은 죄가 있으니,
군사작전 따위는 엄두도 못냈지만...
영국은 입장이 달랐어
영국은 아이슬란드의 일방적 선포에 대항하여,
37척의 군함과 7000여명의 병력을 보냈고,
아이슬란드도 자신들의 가진 병력을 총동원(100명 대군과 7대의 순찰선)하여 대치하였지...
순수하게 군사력만으로 비교해본다면,
동원된 병력만으로도,
영국은 아이슬란드를 '전멸' 시키는 것 까지 가능 했겠지만..
이제 세계는 더 이상 영국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대가 아니였고,
서방국가간 전쟁, 그것도 약소국과 어업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영국은 아이슬란드와 협상을 택했어.
그리고 마침내 1961년 3월-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12해리 영해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였고,
같은해 6월 독일도 영국과 같은 내용의 각서를 교환하였어.
다만 아이슬란드도 영국과 독일의 요구를 하나 수용 하였는데, 차후 어느 일방의 현상을 변경하면, 일방의 청구만으로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청구가 가능하도록 합의한거야
* 이 분쟁의 위기를 최고조로 끌었던 사건 중 하나는 토르가 트롤짓을 공격했던 것 인데... 토르라는 이름의 아이슬란드 어선의 영국의 트롤어선 행크네스에 발포를 했던 사건을 말함
* 전쟁이라 불리고 발포도 있었지만 1차 대구전쟁에서는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어
이렇게 대구 관련 분쟁은,
평화롭게 해결된 듯 보였지만,
1차 전쟁 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1972년 아이슬란드가 50해리의 영해를 선포함으로서 분쟁이 재점화 되었어
유럽친구들 안녕, 오늘부터 아이슬란드 앞 바다 50해리까지 우리 영해로 선포할테니까 나가줄래?
??????????? 이거 약속 위반 아니냐????????????????????????????????????
그러게 씨밤.. 이거 통수치는거 아니냐???????????????????????????????????????
통수라니..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사정이 변했다 이거야!!!
그리고 ㅅㅂ 니들은 이거 아니라도 먹고살게 널렸지만 우리는 이게 전부다 배째!!!!!!!!!!!
* 아이슬란드 입장에서도 사정은 있었는데 1차 대구전쟁에서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
1961년 11만t을 건져올렸던 대구는 10년후 4만 4500t으로 급감했고,
청어 역시 76만t에서 6만t으로 급감해버렸어..
* 사실 이 분쟁은 영국과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등도 얽혀 있었는데..
아이슬란드는 자신들은 어업의 전부인 나라이지만, 솔직히 니네 한테는 아이슬란드 근교에서 잡는 고기가 어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만 봐도 너무 미미하지 않냐는 논리로 호소했고...
애초부터 아이슬란드 근교에서 아주 미미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이에 동의해줬어
- 그러나 그 보다는 어획량이 훨씬 컸던데다가 각서까지 교환했던 영국과 독일정부는 이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아이슬란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벌어진 이 재판의 최대쟁점은,
바로 국제사법재판소가 이 사안에 관한 관할권이 있느냐 하는 것 이었는데,
아이슬란드는 이전에 한 쪽의 일방적인 현상변경 시, 일방의 고소만으로도 이 사건의 국제사법재판소에 고소가 가능하도록 했던 사안은,
사정이 변경 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웠어(그 조약은 영국의 협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다 등의 주장도 있었지만.. 이건 애초부터 인정받기 힘든 주장이었고.. 최대쟁점은 사정변경의 원칙이 됐어)
* 아이슬란드는 1차 대구전쟁의 결과로 얻었던, 12해리의 영해는 국제적인 기준이 되면서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12해리 영해를 선포했고, 아이슬란드의 권리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데 비해 어로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원고갈의 우려는 심각할 정도로 급증해왔다는 주장을 내세웠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다음과 같았어
사정변경의 원칙자체는 인정하나(사정변경의 원칙은 1969년 비엔나 협약에서 매우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어투로 기술 되었지만, 일단 기술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런 '사정변경의 원칙' 자체가 성립함은 인정했던 것이지)
아이슬란드가 말하는 어로기술의 발전에 의한 자원고갈의 우려는 사정변경의 원칙에 해당하는,
근본적인 이유까지는 되지 못하며,
그에 비해 아이슬란드는 영국-독일과의 합의를 통해 이미 많은 이득을 얻었으므로,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사안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고 했어(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14명 중 10명이 영국과 독일의 주장을 지지, 4명이 아이슬란드 주장 지지)
그리고 구체적인 판결의 요지는 아래와 같아
아이슬란드와 영국, 독일은 아이슬란드의 우선적인 몫과 영국과 독일어민들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어업권을 고려하면서 신의, 성실에 원칙에 기초하여 어업권을 분배해야 하며,
- 지난 5년간 영독 어민들의 평균어획량에 기초하여 영국은 17만톤, 독일은 11만 9천톤의 어획량을 배분함
탕탕탕.
그리고 니네,
친해지길 바래
*쉽게 요약하면 영국-독일이 승소하고 아이슬란드가 좃망했다는 소리
ㅋㅋㅋ 고생했다 이따 회식이나 하러가자 만세, 만세!!!!
나 이거 인정못함
??????????????????????????????????????????????????????
어차피 국제사법재판소는 강제적인 관할권은 없다며 나 이거 인정안함ㅋㅋㅋ
이런 ㅁㅊ 이거 양아치 새키 아님??????????
영국과 독일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아이슬란드가 불복하자,
엄청나게 분노하였고,
2차대전 이후 극도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던 독일정부까지 어업지도선을 보내서 아이슬란드의 순시선과 맞섰어
또한 독일보다 강경한 입장이 가능했던 영국은 아예 최정예 프리깃함까지 아이슬란드 근해에 출동시켰고,
아이슬란드 쪽에 인명피해가 발생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지
ㅅㅂ 나 안해!!!!!!!!!!!
드디어 저 양아치 색히가 항복하는건가?
아니 니들 자꾸 이딴식으로 나오면 나토를 안한다고!!!!!!
결국 사상자까지 발생하자 아이슬란드의 국민여론은 폭발하였고,
아이슬란드는 영독이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나토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어
그리고 이때 등장하는 정의의 사도
애들아 안녕 형이다,. 니들 무슨일로 이렇게 싸우고 그러니???
아니 형님 영국이랑 독일놈들이 막 덩치만 믿고 저를 때리잖아요ㅠㅠ
와 이 새 키 연기하지 마라... 야 법대로 해 법대로!!!!
내가 쭉 보니까,
영국이랑 독일이가 잘못했네.
아이슬란드의 눈물이 그 증거임
니들 다시 합의봐라
*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영국과 독일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승소에도 불구해고 50해리 안에서의 어업활동을 포기하고, 쿼터량 또한 축소해야 했어...
* 미국이 갑자기 약소국인지 감수성이 발동한 것은 아이슬란드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너무 컸기 때문에, 만약 아이슬란드가 나토를 탈퇴하고 소련과 손을 잡는다면, 서유럽과 북유럽 전역이 소련의 사정권이 되고, 미국의 유럽에서의 대소련 억제력은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야
* 사실 미국 뿐만 아니라 졸지에 '쿠바사태'를 앞마당에서 겪게 될 다른 유럽국가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영독 양국을 압박했음
이렇게 2차 대구전쟁까지 끝나고,
드디어 북해의 평화가 오는 듯 했지만,
이 문제가 해결된지 불과 2년도 안되어서,
또 다시 제 3차 대구전쟁이 발생하고 말지...
영국, 독일 침략자놈들아 안녕
저 새키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또 뭔데....
요즘 전세계적인 트랜드가 자원 민족주의고,
200해리 영해를 선포하는 나라들이 생겼다며
나도 유행 좀 타볼라고
나는 이제 모르겠다... 영국아 너도 그냥 웬만하면 쟤 피해라...
닥쳐라 이 패배자 자식아,
우리 대영제국이 니네 패전국놈들이랑 같은줄 아냐
야 아이슬란드 기다려라 형이 이번에는 진짜 간다
이 3차 대구전쟁은 이전 2차례 전쟁보다 훨씬 치열 하였으며,
아이슬란드의 발포와 덩치에서 압도하는 영국 순시함의 들이받기 전술로,
북해는 난장판이 되어버렸지...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영국이 철수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 하겠다고 선포했어
미국 형님 이거 지켜만 보실껍니까?
저희한테 고속정이라도 팔아주세요!!!!!!!
* 고속정 좀 산다고 영국을 이길 수 는 없었을테니까.. 고속정은 떡밥이고 어서 잽싸게 중재를 해달라는 소리..
아 이건 좀....
ㅅㅂ 놈아 싫어??? 싫으면 나 소련한테 고속정 팔 수 있냐고 한번 물어본다ㅋㅋㅋ
헐... 누가 싫다고 함????
나는 약소국인지 감수성이 풍부한 나라임....
기다려라ㅠㅠ
애들아 북해분쟁에 대해서 그냥 영국이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저요저요!!!!!!!
* 이것을 희대의 기회라고 생각한 소련은 당연히 아이슬란드의 입장을 강력지지 했고,
* 소련의 그런 거친생각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ECC 국가들도(아이슬란드의 전략적 중요성은 소련의 핵미사일 등을 포함하여 아이슬란드를 군사요새화 할 경우, 유사시 미국 또한 유럽을 지원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져.. 한마디로 유럽전체가 소련의 세력권이 되는 것) 적극적으로 아이슬란드를 지지하고 영국이 양보할 것을 주장했어
* 거기에다가 캐나다, 멕시코와 같은 국가들도 뜬금 등판하여 아이슬란드를 지지했는데, 200해리 영해가 국제적으로 확립되면 미국과 소련에도 매우 유리했지만, 마찬가지로 해안선이 긴 다른국가들에게도 개이득 이었기 때문에 이들까지 나서서 영국을 압박했어
자 영국아 너만 양보하면 편해... 어쩔래???
ㅅㅂ 근본없는 양키새키들... 저것도 동맹이라고ㅠㅠ 아 옛날이여ㅠㅠㅠㅠㅠㅠㅠ
결국 ECC(EU의 전신)는 유럽전역에 200해리를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삼기로 정하였고,
이 3차례에 걸친 대구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종결되었지
반면 영국은 2차대전 이후 당한 수많은 굴욕사 중에 하나를 더 추가 하였는데,
이 대구전쟁의 결과로,
영국의 수산업을 결정적 타격을 입어, 1500명의 어부와 7000명의 어업관련 종사자가 일자리를 잃었어(영국이 이 대구문제에 전쟁까지 불사하며 이렇게 강경하게 나갔던데에는, 이 어부와 어업종사자들이 당시 집권 노동당의 지지기반 이었던 이유도 있었어)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지금도 독립 기념일에,
이 대구전쟁에서의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르며,
아이슬란드인들에게,
이 어업분쟁의 승리는,
핀란드인들이 생각하는 겨울전쟁이나 러시아인들의 생각하는 독소전쟁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의미를 지녀.
물론 이런 대구전쟁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대구에 대한 전세계적인 차원의 유서깊은 남획문제는,
전쟁으로도 해결할 수 있던 것이 아니라서,
대구의 어획량의 감소는 막지 못했지...
(2010년대 이후 여러 노력의 결과로 대구의 어획량은 조금씩 증가추세로 돌아서기는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영국을 상대로 패기를 보여줬던 아이슬란드인들은,
대구의 어획량 감소에도 매우 현명하게 대응하여,
자신들의 영해 안에서는 어획량을 철저히 쿼터제를 두고 관리하여,
적은 어획량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의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됐어
또한 3차 대구전쟁 당시 까지만 해도 아이슬란드의 경제에서 어업은,
GDP의 90%가까이에 이르렀으나,
이후 아이슬란드 또한 어족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의 한계를 느끼고,
금융, 관광, 정보통신산업의 개벌에도 국력을 기울여,
현재 아이슬란드의 산업구조에서 어업은 50% 정도로 떨어졌지만,
아이슬란드는 세계적인 부국(2008년 금융위기를 겪기는 했지만)으로서 풍요를 누리고 있지
* 이 대구전쟁으로 불리우는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어업분쟁의 결과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슬란드 덕분에 200해리 경계수역이 전세계적인 기준으로 확립되었고, 3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이 덕을 크게 보게 되었지
*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판결은 아이슬란드의 불복으로 인하여 이 사건에 '한 해서는'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여기에서 논점이 되었던 사정변경의 원칙(원칙자체는 인정되나, 현실적으로 인정받기가 매우 어려움)과 더불어,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기존의 권리는 적절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그 이후 해양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돼
* 가끔 이 분쟁의 결과를 보면서 강대국을 상대로한, 벼랑끝 전술의 효과에 대해서만 너무 감명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이러한 패기넘치는 벼랑끝 전술의 꼭 필요할때도, 효과를 볼 떄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과 더불어, 아이슬란드의 승리는 단순한 벼랑끝 전술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강대국들간의 분쟁구도와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적인 노력들이 있었음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꺼야
* 이상으로 대구전쟁에 대한 소개글을 마칠게
*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