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에 태어난 키시 벨러(영어 위키에는 벨라키스로 되어있지만 헝가리는 한국처럼 성+이름 형식이다.)는 헝가리인으로 부다페스트 근교 친코타 마을에서 1900년경부터 판금공으로써 살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금발머리에 꽤 잘생긴 사내였다. 경제적으로도 어느정도 여유가 있었는지 1912년 경 그는 야쿠벡이란 여자를 가정부로 고용했다.
그런데 그는 이 때 약간 이상한 행동을 했다. 아마추어 점성술을 한다던지 추어 점성술을 한다던지 오컬트에 심취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언제부터인가 커다란 금속 드럼통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곧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가솔린을 모으려고 금속통을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아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의 아내가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1914년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37세의 키시 벨러도 징집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 1916년이 되었다. 이 해 7월 부다페스트 경찰이 전쟁물자를 모으는 과정에서 키시 벨러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금속통에 담아두었다는 가솔린들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금속통들을 찾아낸 후 가정부인 야쿠벡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내용물을 확인해보고자 금속통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있어야 되는 가솔린은 없고 웬 알몸의 여자 시체가 알코올에 푹 담겨있었다. 시체에서 피가 흘러나와 알콜은 피로물들어 있었다.
기겁한 오스트리아-헝가리 경찰은 24개의 금속통을 전부 뜯어내었다. 그 결과 총 24구의 시체, 즉 23명의 여자 시체와 1구의 남자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들은 몽땅 알콜에 담겨있었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던 그의 아내도 알콜에 푹 담겨진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확인해본 결과 그의 아내가 어떤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걸 눈치챈 키시 벨러가 둘을 살해해서 알콜에 담근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형사였던 카를 나기는 바로 가정부인 야쿠벡을 체포, 심문하면서 그의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범으로 의심받았던 야쿠벡은 경찰에게 키시 벨러가 가정부인 자신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비밀 방이 있다고 증언했다. 확인해본 결과 이 비밀방은 책장으로 가득했지만,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편지가 잔뜩 있었다. 이 편지들은 키시 벨러가 '호프만' 등 일부 가명을 사용해서 최소 74명의 여자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사진들이 있었다. 책장의 책들은 대부분 독이나 교살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조사해본 결과 1903년이나 그 이전부터(1903년이란 것은 가장 오래된 편지가 1903년에 쓰여진 것으로 판명됬기 때문이다.)키시 벨러가 부다페스트 근교에 사는 결혼 적령기 여성들에게 가명을 사용해 편지를 보내 유혹하거나 신문 광고를 통해 희생자들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사전에 미리 부다페스트나 그 일대에 가까이 사는 친척이 없는 여자들만 골라두었고, 유혹된 여성이 집으로 오면 그녀를 교살한 후 알콜에 푹 담군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고로 유혹된 여성 중 2명은 돈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간 것도 확인되었는데 두 여자는 그 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희생자는 24명 이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마가렛이라고 불리는 젊은 과부의 경우 사전에 미리 그의 어머니에게 미국으로 자신이 이민간다는 편지를 쓰게 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가정부 야쿠벡은 자기 고용주가 무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정황 및 증거 때문에 키시 벨러가 살인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의 살인 수법 과정에서 알콜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이 흡혈귀를 연상시켰기에 그는 친코타의 흡혈귀라고 불렸다. 카를 나기는 이 악마 같은 살인마를 잡기 위해 행방을 수소문했다. 문제는 이름 자체가 흔한 편인데다가 그가 전선에 있다가 소식이 끊겨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를 잡는 것은 요원해보였다.
석달 후인 10월. 카를 나기 형사는 키시 벨러가 세르비아의 병원에서 장티푸스로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이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세르비아의 병원으로 갔고, 시체를 확인했다. 그런데...
시체는 키시 벨러가 아닌 다른 병사의 시신이었다. 키시 벨러는 미리 낌새를 치고 시체와 바꿔치기한 후 도망친 것이었다.
이후 키시 벨러는 적어도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목격담은 여기저기서 들렸다. 혹자는 그가 황열병으로 터키에서 죽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가 루마니아에서 절도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목격 정보들도 몇 개 존재한다. 그 중 가장 빠른 목격 정보는 1차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 부다페스트의 옛 사냥터에서 그가 목격되었다는 제보였다. 하지만 경찰이 출동했을때는 그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이후 1920년, 혹은 1924년에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한 한 인물이 자기와 같이 복무한 '호프만'이란 이름을 쓰고 있는데 스페인 식 교수형틀을 정말 잘 다룬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호프만이란 이름은 키시 벨러가 가끔 쓰던 가명이고 그의 살인 수법이 교살이라는 점에서 이 남자가 키시 벨러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해 조사해본 결과 호프만의 외모는 키시 벨러와 외모가 유사했다. 바로 경찰이 출동했지만 이 남자는 이미 낌새를 챘는지 또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 뒤 키시 벨러로 보이는 또 다른 인물이 1932년 뉴욕에서 목격되었다. 살인 담당 형사 헨리 오스왈드가 타임스퀘어에서 키시 벨러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 추적했지만, 놓쳐버렸다. 이후 1936년 뉴욕의 한 아파트에 사는 재단사가 키시 벨러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을 들은 뉴욕 경찰이 재단사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로 갔다. 하지만 이 재단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후 키시 벨러에 대한 소문은 끊겨버렸다. 하지만 엽기적인 살인 수법 등으로 인해 그는 꽤나 유명해졌다. 그를 소재로 한 공포 영화가 독일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