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역사상 마지막 황제들은,
은나라의 주왕처럼, 희대의 악당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고,
* 이 주왕의 경우에도 공자의 제자 자공처럼 정말 저 정도까지 였을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들도 있어
한나라의 헌제나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처럼 의외로 동정을 사는 경우도 많이 있어.
그리고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나,
명나라의 숭정제처럼,
이미 멸망해가는 나라를 필사적으로 살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의 경우는,
평시였다면 유능한 황제가 되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사기도 하지만,
마지막 황제의 제위시기가 그 나라 역사상 가장 리즈시절 이거나,
미자막 황제가 그 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인 경우는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있을텐데...
관련하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지막 황제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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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글의 주인공 페드루 2세.
개인적으로 200여년에 가까운 브라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이자,
인류 역사상 제위에서 쫒겨났던 마지막 군주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이 페드루 2세는 어떤 인물 이었을까?
페드루 1세
훗날 브라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되는 페드루 2세 이지만,
그의 즉위는 5세에 나이로 갑자기 이뤄졌는데,
바로 위 사진 속 인물이자,
브라질 독립의 영웅인 부친인 페드루 1세가,
* 이 브라질 제국의 초대황제는 본래 포르투갈의 왕세자였어
나폴레옹 전쟁떄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이 피난을 오게 되었고.
이후 포르투갈은 수복 되었지만,
본국과 식민지 브라질의 갈등이 발생하자,
왕세자는 브라질의 독립전쟁을 이끌게 됨.
우루과이의 독립을 막지 못해 인기가 떡락하고,
폭동까지 일어나자,
* 패전 이외에도 그의 통치는 독재적 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브라질 내 극심한 정치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했어...
국민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 아버지가 포르투갈로 런을 하면서 페드루 2세는 불과 5세에 나이로 황위에 등극하게 됐어
5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황제는 통치를 할 수 없었고,
그는 16살될 떄 까지 세명의 섭정이 브라질을 통치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브라질은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거듭 되었고,
황제는 부모 없이 홀로 성장해 가야했지
* 그의 어머니는 페드루 2세가 1살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런...
페드루 2세의 성장과정은 외롭고, 불우하였으나,
그는 도덕적이면서도,
남미의 일반적인 지도자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진지하고 냉철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어.
그리고 이 페드루는 세종처럼 평생에 걸쳐 공부하는 것을 즐겨 했는데,
인류학, 역사, 지리학, 지질학, 의학 법학, 종교학, 철학, 회화, 조각, 연극, 음악, 화확, 물리학, 천문학 시 및 기타 기술 등 황제는 평생에 걸쳐 여러 분야를 공부 하였으며,
포르투갈어 이외에도,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같은 유럽의 언어들과 심지어 히브리어와 아랍어 ,산스크르트어에 중국어까지 구사하고 쓰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해.
나는 황제가 아니었으면,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미래의 사람들(어린이와 청년)을 준비시키는 것 보다 더 고귀한 일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페드루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매우 큰 행운이 되었는데,
황제는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사진사가 되었으며,
이 사진기술에 관한 연구소와
화학과 물리학 연구소,
천문대 설치,
브라질 역사 및 지리학 연구소, 국립 오페라 아카데미 등을 설립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 육성을 위한 노력과 함께,
브라질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를 건설하여,
전국민에게 교육을 강조 하였으며,
브라질의 인재들을 국가에서 장학금을 주어 유럽에 유학시켜 선진문물을 배우고 오도록 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 이었어.
* 황제의 명성은 바다 건너 유럽에도 전해져, 그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빅토르 위고로 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진정한 자손'이라고 극찬 받았으며, 위고 외에도 다윈, 니체, 파스퇴르, 바그너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위대한 석학들이 이 페드루 2세를 존경하였어.
* 페드루 2세는 또한 유럽의 여러 유구한 학회 및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황제의 엄청난 인맥들은 브라질의 인재들을 유럽의 여러 유수 교육기관에 보내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지.
정치
물론 역사를 볼 때 정치지도자가 대단히 뛰어난 학문적 경지에 올랐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실패를 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을꺼야.
그러나 이 페드루 2세는 '정치'를 매우 잘 이해한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브라질의 거듭된 혼란을 종식 시키고,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기틀이 되었지.
페드루 2세는 1847년 브라질에 '내각제'를 도입하였고,
그의 재위기간(49년) 동안 36번의 내각이 교체 되었는데,
그는 브라질 정계의 양대세력인 보수당과 자유당을 현명하게 중재하며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고,
페드루가 임명한 장관들과 자문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로서 브라질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했어.
* 페드루 제위 기간의 대부분의 내각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현대에도 정권의 안정적인 교대를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또 그러한 민주주의가 유능한 통치를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안할때.. 서로 다른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비폭력적인 정권교체 방식을 정착 시키고 질서있는 통치를 행한 페드루의 정치력은 정말 고평가 받아야할꺼야.
* 단 이 브라질의 내각제는 완전한 영국식 내각제는 아니라, 황제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했는데, 페드루 2세 시기 브라질 제정은 영국식 내각제와 러시아 차르정의 중간으로 평가 받기도해.
* 물론 황제는 독재적이지 않아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비판에도 관대 하였으며(이로 인해 황제는 관대왕으로 지금까지 칭해져)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신을 비판한다고 처벌하는 일 또한 하지 않았어.
경제성장, 근대화, 승전
황제가 이렇게 혼란을 거듭하던 브라질 정국을 안정시킨 것은 곧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는데,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재위기간은 브라질은 전세계적에서 매력적인시장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플렌테이션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브라질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어.
특히 브라질의 경제정책에 있어 페드루 2세의 혜안이 빛났던 부분은,
그가 사탕수수 대신 커피의 재배를 장려했던 것인데,
이후 커피산업이 얼마나 엄청난 시장(커피중독이 사회문제로 여겨질 정도로...)이 되었는지를 감안 한다면,
이 사탕수수 농업의 커피재배로의 전환의 중요성은 몇번을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꺼야.
그리고 황제는 이러한 경제성장의 결과로 인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자금들을,
브라질 근대화에 투입 하였는데,
페드루 2세 재위 시기 브라질과 유럽을 잇는 최초의 해저 전신 케이블을 비롯하여,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포장도로 건설과 브라질 최초의 증기기관철로 건설, 최초의 우표발행 등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경제성장과 동시에 근대화 또한 이루어졌어.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으레 그렇 듯이 이러한 급격한 국력의 신장을 바탕으로,
페드루는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는데,
우루과이로부터 샬사와 파인사두를 점령하였고,
이후 파라과이의 브라질 침략에 맞서 우루과이 및 아르헨티나와 동맹을 맺고,
6년간의 전쟁 끝에(이 전쟁은 파라과이 입장에서 정말 파멸적인 전쟁이 되었어) 마투그로수 주의 확대와 함께 1만 4천KM의 달하는 영토를 아르헨티나와 나눠먹고 이과수 폭포 또한 삼등분 하였어
반면에 미국 및 유럽국가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브라질의 성장을 견제한 영국이 브라질 상선을 볼모로 잡고 배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영국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전쟁을 각오할 정도의 배짱을 부렸는데,
이러한 브라질의 태도에 당황한 대영제국은 결국 국제중재를 통해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합의하여 처리했고,
이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세계최강이라 불리던 대영제국의 오만한 콧대를 꺽은 사건으로 칭송을 받았어
* 이때 황제가 우호관계에 공들였던 미국이 브라질 제국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 또한 페드루의 외교적 승리였지.
폐위
이렇게 브라질은 그의 제위기간 동안 급격한 발전 및 국가 위상의 제고가 이뤄졌는데,
브라질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미 대륙에서 비교할 수 없는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국가가 되었지만,
황제에게는 마지막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예제도의 폐지였어
황제는 개인적으로 평생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사실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 노예 해방을 말한 사람들이 노예를 소유한 경우는 의외로 많지만..)
노예제도는 비인간적인 것으로 혐오했지만,
'현실 정치가'로서 노예제의 급격한 폐지가 브라질 경제에 가져올 파장과 반대파들의 극단적인 반발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추구 해갔는데(황제는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장려하고 노예제가 폐지 되었을때를 대비한 새로운 경제체제를 대비해놨지)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노예제도의 폐지가 이뤄졌을 때(정확히는 황제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노예제 폐지론자인 딸 이자벨라가 노년에 접어든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할때, 황제의 뜻을 받들어)
결국 이는 브라질 제정을 폐위시키는 '혁명'을 불러 일으켰는데,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브라질의 지주들은 노예제 폐지에 큰 불만을 품고 황제를 폐위 시키려 하였어.
이들은 황제가 노예제를 폐지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를 멋대로 결정한 것은 월권으로 민주주의(?)에 반하는 독재적인 태도라고 공격 하였으며,
* 또한 황제는 카톨릭 교회와도 반 프리메이슨 법의 제정을 거부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어.
경제성장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식인층 및 공화주의자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군대와 결탁하여(사실 파라과이의 긴 전쟁을 치르면서 흑인장병들의 용맹성을 본 많은 브라질 장교들이 노예저 폐지에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와 지주들의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결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통치가 길어지면서 군인이나 도시 중산층들은 반대로 황제가 자신들과 같은 새로운 세력을 소외시키고, 농촌 지주들만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어쩃든 양측은 황제의 폐위에는 공통에 의견을 갖게 되었지) 제정을 폐지하는 혁명이 단행되었고,
황제는
" 그 동안 너무 열심히, 너무 많을 일을 하였다. 이제는 쉬고싶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망명을 떠났어.
그리고 유럽의 호텔방들을 전전하다가
2년후 파리에서 당뇨병과 폐렴으로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해.
그 이후
이렇게 '브라질 제국'은 사라지고 페드루 2세는 마지막 황제가 되어,
유럽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페드루 2세의 폐위는 민주정으로의 발전이 아니라,
사실상의 과두정으로 이어졌고,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고,
경제적으로도 성장이 끝나고 여러 모순들이 브라질 사회를 휘감았으며,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요구는 오히려 거부 되었어.
결국 이런 상황은 황제에 대한 강한향수를 불러 일으켜,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한동안 금기시 되던(사실 황제정이란 것이 한계가 있는 체제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새로운 계층의 성장과 같은 시대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래도 페드루 2세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황제였고, 사실 대다수 평민들은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황제가 왜 폐위되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어)
페드루 2세의 유해는 결국 브라질로 모셔져,
그의 이름을 딴 페트로폴리스에 1920년 안장되었어
* 페드루 2세는 오늘날 브라질에서는 완전히 복권되어 위인전에도 실리는 인물이 되었어.
* 이상으로 순전히 개인적으로 뽑은 왕조의 마지막 황제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페드루 2세에 대한 소개글을 줄일게
*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