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박명식 장기적출 연쇄 살인사건은 북한에서 일어난 엽기 연쇄살인범 박명식이 벌인 연쇄살인으로 확인된 피살자만 12명에 달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유영철이나 정남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잔인무도하다.
그는 1990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14살부터 17살까지 청소년과 1명의 20대 여성을 상대로 연쇄살인을 벌였으며 범행 방법도 한국의 어떤 영화보다도 잔인할 만큼 엽기적이었으며 복부를 칼로 난자한 다음 장기를 적출했다.
당시 수사에 나섰던 함경남도 신포시 보안서가 제때 범인을 잡지 못해서 희생자가 많아지자 주민들은 공포에 떨면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북한에도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있지만 북한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고 김씨왕조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리하고 있어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극이 다른 지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그런 연쇄살인극들 중에서도 굉장히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기에 북한 조선중앙TV와 《로동신문》에서도 보도가 되는 등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한국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박명식은 수년 전부터 간경화를 앓았는데 함하에 있는 큰 병원과 유명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 치료를 해보았지만 별 효과를 못 보았고 박명식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로부터 점을 잘 친다는 점쟁이 이야기를 듣고 소개를 부탁했다.
원래 북한에는 점쟁이나 종교행위에 대해서 통제와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쉬쉬하는 편이지만 같이 오랫동안 지낸 동료는 박 씨에게 점쟁이를 소개해주었고 점쟁이에게 찾아간 박명식은 자기가 지금 간경화를 심하게 앓고 있으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호소했더니 점쟁이는 사람의 간을 먹어야만 간경화가 완쾌가 된다는 점괘가 나왔다며 알려주었고 젊은 사람일수록 더욱 좋다고 말을 했다.
박명식은 사람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을 했고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어차피 죽을 바에 점쟁이 말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박명식은 먼저 봄철 농촌동원을 나온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했는데 박명식은 낮에 학생들이 머무는 숙소를 찾았으며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에 농촌동원에 나온 학생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든다는 것을 알았다.
박명식은 학생들이 잠든 사이 밤 11시경 학생들이 자고 있던 숙소에 침입하여 흉기로 한 학생을 찔렀고 박 씨는 피 흘리는 학생을 숙소에서 안고 도주를 하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려 학생을 마당에 놓고 줄행랑을 쳤다.
흉기에 찔린 학생은 많은 피를 흘려 다음날 아침에 사망했다.
며칠 후 농장에서 4km 떨어진 곳에 또다시 학생이 납치된 후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두 번째 시신은 농장원이 발견 당시 기절할 정도로 복부가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 보안서에선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잡는데 실패했고 보안 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사건이 발생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뒤에는 산포 시내에서 2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역시 시신의 복부가 훼손되어있었고 사건 이후에도 신포시와 인근 지역엔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되었다.
당시 신포시 당 책임비서는 평양에 회의를 갈 때마다 살인 장군이라는 놀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 10월 박명식은 추수 동원을 나온 학생을 상대로 13번째 살인을 저지르다가 피해 학생이 소리치며 저항하자 도망쳤고 당시 살인범 잡기에 혈안이 된 주민들이 낌새를 채우고 도망가던 박명식을 붙잡게 되었다.
주민들은 박명식을 신포시 보안서에 넘겼고 박명식에게 간을 먹으라고 말해준 점쟁이도 박명식 진술에 따라 체포되었다.
그는 신포시 인민재판소에서 공소사실을 인정했고 12명의 생명을 앗아간 연쇄살인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총살형으로 공개처형되었다.
점쟁이는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본인이 점만 쳐줬을 뿐 특별히 살인을 지시한 게 아니라고 주장 했기에 살인교사죄 적용이 불가능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화소에서 15년 복역하고 2006년에 만기 출소해서 신포시에서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