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인슈타인은 공부를 못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보고 공부를 못했다고 말하면서 공부를 잘해야만 살아남는 한국 교육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인슈타인은 공부 잘했다. 잘하는 과목과 못하는 과목 사이 편차가 좀 크긴 했지만 잘하는과목(수학 과학)을 넘사벽으로 잘해서...
아마 아인슈타인의 공부 못하는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아인슈타인과 에디슨을 헷갈려 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에디슨은 공부 못했던거 맞다)
다만 학교 부적응자는 맞았다. 당시 독일은 반유대주의+군국주의 정서가 매우 심했다
2. 아인슈타인은 좋은 대학교 나왔다.
아인슈타인이 나온 대학교 ETH는 지금도 유럽에서 꽤나 알아주는 매우매우 좋은 학교다. 교수진도 짱짱했고 교육도 훌륭했다.
3. 아인슈타인은 대학교때 밉상 출튀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교때 거의 모든 수업을 나가지,않았으며, 많은 교수들은 아인슈타인을 싫어했다. 심지어 이 당시 교수였던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 라고 말했을 정도. 그리고 ETH는 매 분기별로 시험을 보는데, 아인슈타인은 매번 당시 여자친구 밀레바의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해서 시험을 겨우겨우 통과했다. 하지만 항상 밀레바보다 성적이 좋았다(...). 밀레바는 결국 낙제하여 졸업장을 따지 못한다.(그니까 상대성이론을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이 같이 연구했다는 '그 단체'의 말들은 개소리다)
4. 아인슈타인은 부정청탁으로 취업했다.
아인슈타인은 졸업할때 이미 교수들한테 너무나 찍혀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추천서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대학교 친구 그로스만의 아버지(고위공무원이었다고 한다)의 부정청탁을 받아서 취업했다.
5. 아인슈타인은 과외를 한적 있다.
이 짤방은 역대_최강의_과외_선생님.jpg로 꽤 유명하다
이거 때문에 아마 특허청 가기 전 회사(보험회사였나)에서 짤린걸로 알고있다.
과외 받은 학생들과는 나중에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6. 아인슈타인은 특허청 근무를 꽤나 좋아했다.
이과생들은 알겠지만 특허청 근무는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고, 전공을 꽤나 잘해야 하고 많이 써먹는 직업이다.
특히 그당시 여러 장소에 있는 시계를 어떻게 동기화시킬수 있냐는 내용의 특허가 많이 올라왔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발전에 크나큰 영감을 준다.
(그렇다.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다.)
좀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전에 세계관은 절대적인 시간이라는게 따로 있고, 시계란 이 절대적인 시간믈 측정해주는거라고 여긴 반면,
아인슈타인은 이 영감을 바탕으로 시계가 나타내주는 값이 그 장소의 시간 그 자체라고 생각한 것
7.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란 말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란 말을 싫어했다. 절대적인 게 시간에서 빛의 속도로 바뀌는것이기 때문이지, 딱히 더 '상대로워'지는게 아니기 때문
(그니까, 이전의 이론들은 시간을 절대적으로, 빛의 속도를 상대적으로 간주한 반면, 상대성이론은 시간을 상대적으로, 빛의 속도를 절대적이라고 봄)
그리고 '상대성'이라는 용어를 철학자들과 대중들이 매우 오독할거라고 생각했다(실제로 오독을 많이 한다).
8. 시공간은 아인슈타인이 만든게 아니다.
민코프스키가 만들었다.(위에서 나온 아인슈타인 싫어한 그 사람이 맞다.)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이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때 이 시공간의 개념이 필수적이라는걸 깨닫고 태도를 바꾸어 시공간의 개념을 배운다.
이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분기하학이라는 당시로써는 최신 수학이론이 필요한데, 아인슈타인은 대학때부터 수학의 엄밀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더이상의 수학을 배우지 않았고, 이 미분기하학을 다시 배우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동료 수학자인 그로스만에게 배운다.(위에서 나온 부정청탁해준 그 사람 맞다.)
9.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을 만들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만들자고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냈을 뿐. 원자폭탄은 오펜하이며와 페르미와 파인만(그리고 그 외 많은 학자들)이 만들었다.
물론 E=mc^2라는 식이 원자폭탄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은 맞지만. 이것만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것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만 읽고 자동차 만드는 소리라고 보면 된다.(원자폭탄을 만드는데는 핵물리학/원자물리학이 중요한데, 이는 양자역학과 밀접하며 아인슈타인의 분야가 아니었다.)
10.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학계에서 왕따가 된다.
1930년대 이후로 물리학은 양자역학의 시대가 되는데,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 광양자설을 주창하여 양자역학의 시작을 함께했던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파인만을 포함한)후세대 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절대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 골방 꼰대 늙은이'로 여겼다고.
따라서 일반상대성 이후 그의 업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가 열심히 만들려고 했던 통일장이론은 대부분이 헛소리였다.(지금도 열심히 통일장 이론 만들려고 하는데, 양자역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은 그를 종신 연구원으로 삼아 평생 월급을 주었지만, 그는 그의 지금까지의 업적을 리스펙 하는 의미였지 딱히 성과를 바란건 아니었다.(그렇다. 아인슈타인은 월급루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