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이판 섬에 있는 반자이 절벽(Banzai Cliff)이란 곳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최북단에 위치한 반자이 절벽은 겉보기에는 여느 절벽과 다름없이 평범한 절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이판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미군의 투항 권고를 무시하고 절벽으로 뛰어내려 절벽과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절벽의 이름이 반자이 절벽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이들이 뛰어내릴 때 반자이를 외쳤다고 해서 전후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오늘 날의 반자이 절벽의 모습 >
그럼 왜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투항 권고를 무시하고 절벽으로 뛰어내렸는가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이 일의 배경인 사이판 전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1. 사이판 전투
태평양 전쟁의 승기가 미국에게로 넘어온 1944년,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한 전진기지로써 마리아나 제도가 적합하다고 판단, 공략에 나섭니다. 특히 아슬리토 비행장이 있었던 사이판 섬은 주요 공략지이자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 마리아나 제도의 위치, 이곳만 점령하면 일본 대부분의 도시를 폭격권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다. >
1944년 6월, 마침내 미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합니다. 상륙에 앞서 먼저 항공기와 함선의 함포를 이용한 대대적인 폭격이 각각 11일과 13일에 있었는데 이는 해안선에 마련된 일본군의 방어진지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이 이루어진 것은 15일이었습니다.
< 상륙하는 미군 >
이때 투입된 병력이 약 7만 명으로 이들은 곧 해안방어전술에 따라 해안가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은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항공기와 함포 사격이란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미군는 결국 해안방어선은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계속해서 내륙으로의 진격을 이어나갑니다.
< M3 37mm 대전차포를 쏘고 있는 미군 >
< 화염방사기를 이용해 일본군 벙커를 공격하는 미군 >
반면 방어선을 돌파당한 일본군은 밀려나던 와중에도 계속해서 기습과 전차를 이용한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내 산지와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 저항을 이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넘어간 전세를 다시 가져오기에는 일본군의 남은 여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결국 7월 7일 최후의 자살 공격 감행을 마지막으로 7월 9일 사이판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됩니다.
< 반자이 돌격 과정에서 사살된 일본군의 시신을 치우고 있는 미군 >
2. 반자이 절벽
반자이 절벽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이판 전투의 막바지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이판에는 많은 민간인들이 남아 있던 상태였는데 미군의 항복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많은 이가 절벽으로 뛰어 내리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1944년 6월 말에 있었던 천황 히로히토의 칙명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천황은 사이판에서 항복한 민간인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혹시라도 미국의 선전방송에 나가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몹시 염려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염려가 이내 사이판 주민들을 향한 자살 권고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 반자이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 >
<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모습을 찍은 영상 >
이러한 이유로 전투 막바지에 많은 민간인들이 천황의 명에 따라 자결을 택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가 절벽에서 뛰어 내리기 직전 반자이를 외치며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 날 해당 절벽은 반자이 절벽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용 참조 : 권석근, 일본제국군, 코람데오, pp. 244 - 249
네이버 캐스트(전쟁사)
사진 출처 : 3,4,5번째 사진들은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사이트에서
나머지 사진들은 '구글'에서 'saipan battle'이란 키워드로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