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는 '시흥시'라는 이름의 시가 있다
이 두 지역은 대체 무슨 관계인 것일까
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구한말 당시의 지도를 보자
1900년대 초 당시 시흥군 산하 행정구역을 보도록 하자
군내면
읍내리(군청 소재지), 박산리, 안양리, 박달리
동면
봉천리, 신림리, 서원리, 난곡리, 가리봉리, 독산리, 문교리, 상도리, 성도화리
남면
가학리, 노온곡리, 유등리, 장기리, 광명리, 광화대리, 노온사리, 아방리
서면
소하리, 가리대리, 일직리, 자경리, 철산리, 사성리, 하평리, 안현리, 율일리
상북면
구로일리, 구로이리, 도야미리, 당산리, 양진리, 원지목리, 사촌리, 양평리
하북면
신길리, 상방하곶리, 영등포리, 하방하곶리, 중종리, 번대방리, 우와피리
총 6면
그렇다
원래의 '시흥'은 지금의 시흥시가 아닌 금천구 시흥동과 안양, 광명, 구로, 영등포, 동작 일대였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시흥시는 인천부와 안산군에 있던 지역이었고, 시흥군의 영역에는 1mm2도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시흥시는 이름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역사왜곡'(?)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현재의 시흥시는 '시흥'이라는 이름을 가져가게 된 것일까?
이 '시흥군'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자
시간이 지나고 일제강점기가 된 1910년 12월 7일
조선총독부는 군내면 읍내리(현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시흥군청을 하북면 영등포리로 옮긴다
뒤이어 1911년 4월 27일
전국적인 동리 통폐합을 통해 시흥군의 리들이 통폐합되었다
(6면)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는 대대적인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을 갈아엎었다
그 결과 경기도는 이렇게 되었다
시흥군의 리즈시절
서울과 인천, 안산 사이의 평범한 군이었던 시흥군은 이 부군면 통폐합으로 서해바다와 접하는 거대 지자체가 되었다
안산군(북방면, 성곶면, 월곡면 제외)과 과천군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기본적인 행정구역 개편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0면)
신북면을 폐지하고 북면과 신동면에 분할 편입했다 (9면)
아래는 당시 지도
1917년 10월 1일
북면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분리해 영등포면을 신설했다 (10면)
1931년 4월 1일
전국적으로 읍제가 실시되면서 영등포면이 영등포읍으로 승격됐다 (1읍 9면)
이때 영등포읍과 함께 읍으로 승격된 면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 시흥군 영등포읍, 수원군 수원읍
강원도 - 춘천군 춘천읍, 강릉군 강릉읍, 철원군 철원읍
충청북도 - 충주군 충주읍
충청남도 - 공주군 공주읍, 대전군 대전읍, 논산군 강경읍, 연기군 조치원읍, 천안군 천안읍
전라북도 - 전주군 전주읍, 익산군 익산읍, 정읍군 정주읍
전라남도 - 광주군 광주읍, 여수군 여수읍, 제주군 제주읍
경상북도 - 김천군 김천읍, 영일군 포항읍, 경주군 경주읍, 안동군 안동읍, 상주군 상주읍
경상남도 - 진주군 진주읍, 창원군 진해읍, 통영군 통영읍, 밀양군 밀양읍
황해도 - 해주군 해주읍, 황주군 겸이포읍, 봉산군 사리원읍
평안남도 - 안주군 안주읍
평안북도 - 의주군 의주읍, 정주군 정주읍, 선천군 선천읍, 강계군 강계읍
함경남도 - 북청군 북청읍
함경북도 - 경성군 나남읍, 성진군 성진읍, 회령군 회령읍, 경흥군 웅기읍
1936년 4월 1일
시흥군 몰락의 시작
'대경성계획'에 따라 영등포읍과 북면 일부, 동면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되어 시흥군에서 떨어져 나갔다
북면에 남은 잔여 지역은 동면으로 편입되어 북면이 폐지됐다 (8면)
다만 시흥군청은 영등포에 잔류하여 결과적으로 군청이 군 영역 밖에 위치하게 됐다
*1 도림리 상도천 우안 = 현재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동, 문래동
*2 번대방리 상도천 우안 =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3 도림리 상도천 좌안 = 현재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4 번대방리 상도천 좌안 =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이 때의 개편으로 한 동네였던 도림리와 번대방리가 나뉘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고 그 이외의 지역은 시흥군에 남겨둔 것이다
사실 영등포읍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경성부 편입을 반대하고 영등포부 승격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친일파 조선인들은 경성부 편입을 찬성했었고, 조선총독부도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영등포읍은 그렇게 경성부에 편입됐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을 검토했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접었던 바가 있었다
경성부 영등포출장소는 이후 1943년 6월 10일 '구' 제도가 도입되면서 경성부 영등포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부출장소(구 고양군 용강면) 소속이던 여율리(여의도+율도-밤섬) 중 여의도를 영등포구가 가져갔다
(율도=밤섬은 서대문구에 편입됐다)
또한 도림정에서 사옥정(현 영등포구 문래동)이 분리되었다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안양면에 있던 시흥군청
시흥군청이 안양면으로 이전되었다
이에 따라 시흥군청이 다시 시흥군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1949년 8월 13~14일
1936년 분리되어 남아있던 동면 도림리와 번대방리, 그리고 구로리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또한 군청이 이전해 온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읍 7면)
1963년 1월 1일
1963년 당시 영등포구
서울 대확장으로 인해 현재의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에 해당하는 신동면 전역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흡수되었다
안양리를 제외한 동면 전역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시흥군은 '시흥'이라는 지명의 근원지이자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중심지였던 시흥리마저 상실했다
동면에 있던 안양리는 안양읍(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신안양리'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기존 안양읍에 이미 안양리(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서면에 있던 박달리도 안양읍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안양읍 생활권이던 화성군 일왕면 가운데 구 의왕면 지역이 이름을 되찾고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일왕면'이라는 이름은 1936년 당시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합쳐져서 붙은 이름이었다
1963년 일왕면 가운데 구 의왕면 지역은 시흥군에, 구 일형면 지역은 수원시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왕면'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로써 시흥군은 1읍 6면이 되었다
1963년 9월 17일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 그리고 과천면 전역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었다
서울 편입이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무산된다)
1970년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에 서면 산하 광명출장소가 신설되었다
이 광명출장소는 1974년 시흥군 산하로 승격되었다
1973년 7월 1일
시흥군청이 있던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이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시흥군은 안양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분단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한 쪽에 군청을 두면 불편하므로 군청은 계속 안양시 안에 두었다
다시 한 번 군청이 군 영역 밖에 있게 된 셈
시흥군청은 1989년 시흥군 해체 때까지 계속 안양시 안에 있었다
또한 같은 날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곤란이 된 소래면을 시흥군으로 이관했다
(계양면과 오정면은 김포군으로 이관했는데, 이후 계양면은 1989년 인천직할시에 편입되었고, 오정면은 주민 반발로 1975년 다시 부천시로 환원되었다)
현존하는 시흥시가 소래를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에 현존하는 시흥시의 역사는 사실상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즉 1973년 뒤늦게 편입된 소래 지역이 '시흥'이라는 이름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것이 현존 '시흥시'의 무근본성(...)의 시작점인 셈
이로써 시흥군은 7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서면이 소하읍으로,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2읍 5면)
1979년 8월 10일
시흥군 수암면 6개 리와 군자면 7개 리, 그리고 화성군 반월면 5개 리를 반월출장소로 지정했다
다만 출장소는 행정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계속 원래의 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0년 12월 1일
이로써 시흥군은 면보다 읍이 더 많아졌다 (4읍 3면)
1981년 7월 1일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이로써 시흥군에 존재하던 최후의 '오리지널 시흥' 지역이 전부 떨어져 나가 시흥군은 그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광명시는 고려 시대부터 시흥의 영역에 있던 곳이었다)
사실 당시 소하읍은 이미 인구가 15만 명이었을 정도로 과대읍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더 이른 시기에 승격해야 했지만 서울특별시 편입 논의가 지속되어 차일피일 미뤄졌다
결국 1981년 서울 과밀화 문제가 지적되자 소하읍의 서울 편입은 무산되고, 광명시라는 별도의 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흥군은 아래와 같이 3읍 3면으로 축소되었다
과천면에 과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화성군 반월면 월암리, 초평리가 시흥군 의왕읍에 편입되었다
또한 시흥군 소래읍 옥길1~4리가 광명시와 부천시로 분할 편입되었다
소래읍 계수리 역시 일부 지역이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사실상 옥길 2, 4리와 계수리 일부는 다시 원래(1973년 이전)대로 돌아간 셈
현재도 법정동 옥길동은 광명시와 부천시 양쪽에 존재하며, 법정동 계수동도 시흥시와 부천시 양쪽에 존재한다
1986년 1월 1일
정부청사 버프를 먹고 면에서 읍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시로 승격된 것이다
또한 군자면 일부와 수암면 일부, 그리고 화성군 반월면 일부(=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로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안산'이라는 지명이 무려 72년 만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당초 '반월시'로 승격하려 했지만 향토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안산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시흥군은 이제 3읍 2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1988년
게다가 정체성마저 제각각이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안산군에서 시흥군으로 편입된 군자면, 수암면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과천군에서 시흥군으로 편입된 군포읍
1963년 화성군에서 시흥군으로 편입된 의왕읍
1973년 부천군에서 시흥군으로 편입된 소래읍
게다가 이 해가 되면서 군포읍과 의왕읍의 인구가 각각 8만 명을 넘었으며, 소래읍+수암면+군자면의 인구도 9만을 넘긴 상태였다
즉 시흥군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내무부), 국회, 경기도청, 시흥군청은 물론 각 읍·면과 리의 주민들까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시흥군청이었다
I. '시흥시 승격 기본 계획 - 지역주민 동향' (시흥군청안)
소래읍 - "군자면, 수암면과 함께 소래시(가칭) 승격"
수암면 - "자체 발전이 힘든 지역이므로 소래읍과 함께 시 승격"
군자면 - "생활권이 안산권이므로 안산시로 편입"
군포읍, 의왕읍 - 별도 언급 없음
II. 경기도 당정협의회안
군포읍 + 의왕읍 → 시흥시
경기도 당정협의회 안에서는 군포읍 일대가 '시흥'의 정통성을 그나마 갖는 지역이라고 보고 군포읍과 의왕읍을 통합 시흥시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이는 서부권의 시 승격을 주도하던 소래읍이 전통적으로 시흥권도 아니었고, 1973년 부천군에서 뒤늦게 편입된 지역이라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포읍과 의왕읍은 각 읍의 면적이 좁다는 점을 들어 통합 승격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흥군의 시 승격은 각 읍면, 심지어 그 안의 리 사이에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1. 군포읍, 의왕읍 승격안
1) 안양시 편입론
말 그대로 군포읍과 의왕읍을 안양시에 편입시키자는 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양시-군포시-의왕시는 현재까지도 단일 생활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군포시에 '안양'이 들어간 공장이나 아파트가 있다든지, 의왕시에 '안양', ' 평촌', '인덕원'이 들어간 시설물이 있을 정도
안양시청 건설교통과가 군포시와 의왕시의 교통도 담당하고, 택시도 3개 지역 내에서는 시외 할증이 붙지 않는다
학군도 안양권으로 동일하고, 법원, 검찰청, 세무서, 등기소도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겨우 시로 승격하려고 하는데 ㅈㄹ 마세요 ㅗㅗ"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들은 이 안에 대해 극도로 반발하였다
당시 두 읍 주민들은 독자적인 시로 승격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 안은 주민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2) 통합 시흥시 승격론
"'시흥'의 마지막 적통은 우리에게 있다!!!"
1988년 8월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들은 '시흥시 승격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두 읍을 '시흥시'(가칭)로 승격시켜줄 것을 청원했다
당시 군포읍 주민들은 '시흥'의 마지막 정통성은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시흥군 내 읍 가운데 시흥에 편입된 역사가 가장 길기 때문이었다 (1914년 편입)
특히 군포읍은 뒤늦게 시흥군에 편입(1973년 편입)된 소래읍이 '시흥' 명칭을 가져가는 데에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당시 군포읍과 의왕읍은 이 외에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 속달리, 도마교리, 건건리, 둔대리를 통합 시흥시(가칭)로 편입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실제 이 요구는 1994년 12월 26일 건건리(안산시로 편입)를 제외한 4개 리가 군포시에 편입되면서 현실화되었다
3) 군포시, 의왕시 개별 승격론
주민들의 통합 승격 요구와는 달리 정부와 두 읍사무소 측은 개별 승격을 지지했다
이는 임명제 관선 시장 자리(낙하산)가 하나 더 생기고, 읍사무소 공무원의 일자리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안으로 최종 결정되면서 군포읍과 의왕읍은 1989년 1월 1일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로 개별 승격되었다
2. 안산시 편입 운동
(1) 군자면
처음에는 군자면 가운데 거모1, 2, 5리(위 지도 파란색) 주민들이 안산시 편입을 요구했다
이미 1979년 반월출장소 출범 때 거모리 일부가 반월출장소로 편입되어 거모리가 분절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거모리 주민의 80%는 반월공단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안산에 대한 동질감이 매우 강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군자면 전역(위 지도 녹색)이 안산시에 편입을 요구하게 되었다
거모1, 2, 5리는 당시 교육, 체신, 통신, 전력, 수도, 소방 등의 서비스를 안산시로부터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무와 경찰은 광명시)
(2) 수암면
수암면에서는 수암1~2리, 장상1~3리, 장하1~2리, 화정1~2리(위 지도 빨간색)가 안산시 편입을 요구하였다
이 지역 역시 군자면 거모1, 2, 5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교육, 체신, 통신, 전력, 수도, 소방 등의 서비스를 안산시로부터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시 세무와 경찰은 광명시)
무엇보다 이 지역은 1914년 통폐합 이전 안산군청이 소재하던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 안산군의 중심지가 정작 안산시가 아닌 시흥군에 묶여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안산초, 안산중, 안산상고, 안산고 등 '안산' 지명을 붙인 학교가 있었다
3. 안양시 편입 운동
수암면에서는 안산시 편입 요구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목감리와 조남리(위 지도 분홍색)에서는 안양시로의 편입 요구도 있던 것이다
실제로 이 2개 리는 안양 생활권으로, 이 지역 주민들도 안양시장을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학군 역시 안양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4. 부천시 편입 운동
소래읍 북부의 계수리 1, 3통(위 지도 노란색) 주민들이 부천시 편입을 주장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수리 가운데 일부는 이미 1983년 부천시로 편입된 바 있을 정도로 계수리는 확실한 부천 생활권이었다
버스 역시 부천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36회나 있었지만 소래읍의 중심지였던 신천리나 대야리로 직행하는 버스는 하나도 없었다
당시 이 곳은 전화와 소방은 부천시가, 교육은 안산시가, 경찰과 세무는 광명시가 맡는 굉장히 기형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5. 광명시 편입 운동
소래읍 동부의 과림리와 무지리(위 지도 하늘색)는 광명시 편입을 요구했다
이미 1983년 바로 윗동네였던 옥길1, 3리가 광명시에 편입된 상황이었고, 생활권도 광명 생활권이었다
이 지역은 1986년부터 광명시로의 편입을 요구해왔다
특히 이 지역은 등기와 상공회의소는 안양, 경찰과 세무, 전기는 광명, 전화는 서울, 노동과 소방은 부천, 교육은 안산이 담당하는 초혼란 상황이었다
모두 정리해 보면...
거기에...
"소래읍 우리한테 주셈!!!"
당시 인천직할시와 부천시는 역사적 이유를 들면서 소래읍을 자기네들한테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소래읍 주민들은 물론 경기도, 중앙정부(내무부)도 인천과 부천의 요구를 거절했다
1989년 1월 1일
정부는 결국 시흥군 동부의 군포읍과 의왕읍을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로 승격시켰다
이 부분에서는 두 읍의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군포시는 1994년 당초 요구대로 반월면 일부 지역을 편입하였다
하지만...
소래읍의 승☆리
서부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에서 일었던 타 시 편입 요구는 완전히 묵살되고 말았다
생활권도 완전히 다르고, 같은 동네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소래읍과 군자면, 수암면이 하나로 묶여버린 것이다
이것은 소래읍이 요구하는 방안과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래읍이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1973년 편입된 소래읍이 '시흥'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며 새로 생긴 시흥시는 최소한의 역사적 정통성도 확보하지 못했다
즉 1989년 승격된 시흥시는 시로 승격시키고 남은 시흥군의 잔여 지역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시흥시는 소위 '근본이 없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 '시흥시사' 일부, 시흥시청 발간
이러한 시흥시의 무근본성은 시흥시 본인들조차도 인정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시흥시는 시로 승격된 이후로도 타 시 편입 요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시흥시는...
당연히 어떻게든 각 동의 이탈을 막아야만 했다
한두 동 떼어주다 보면 결국 남은 길은 시 해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쪼록 시흥군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5년 4월 20일
시흥시가 결국 안산 편입 요구가 있었던 법정동 장상동, 장하동, 수암동, 화정동 1, 2통을 안산시에 넘겨주게 되었다
타 시 편입 요구가 있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시흥시가 갖고 있을 명분이 너무 부족해서였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행정동 이름이 '안산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때까지 '안산동'은 시흥시에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이야 말로 앞서 언급했든 구한말 당시 안산군청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흥시는 더 이상의 추가적인 타 시 편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모동, 계수동, 과림동, 무지내동, 목감동, 조남동 등 다른 동의 타 시 편입 요구는 완전히 무산된 것이었다
시흥시의 현재
통일성 없는 읍면을 억지로 하나의 시로 만든 대가는 매우 컸다
시흥시는 2000년대 초반 전화 지역번호 광역화 전까지 시역 내의 지역번호가 4개에 달했다
정왕동 등 군자권에서는 안산(0345), 신천동 등 소래권에서는 인천(032), 목감동은 안양(0343), 과림동과 무지내동은 서울(02) 지역번호를 썼다
(현재까지도 과림동 일대는 02 지역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시로 승격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시흥시'라는 통일된 정체성은 희박하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부천, 안산, 인천, 안양, 광명 생활권으로 나뉘어 있어 도시 구조가 연담화되지 못하고 완전히 엉망이다
시의 분열을 막고자 시흥시는 신천동에 있던 시청을 1997년 시 한가운데 장현동으로 옮겼지만, 이것은 도시 구조를 더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사이 시 승격 당시 소래권에 있던 시흥시의 주도권은 시화공단이 있는 군자권(정왕동)으로 넘어가 버렸다
문제는 정왕동(통칭 '시화지구')은 안산과 동시에 도시개발이 진행된 지역이라 '안산시 정왕구'라는 소리까지 듣는 지역이라는 것
여전히 각 생활권 간 교통 연계는 답이 없는 상태이며, 지금까지도 타 시 편입 여론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서해선이 뚫리며 다소 나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안산시와 부천시, 인천광역시는 시흥시를 편입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아예 시흥군을 해체하고 생활권대로 부천, 안산, 안양, 광명, 인천이 나눠갖자는 여론까지 나왔었다
물론 시흥시는 이러한 타 시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시흥시는 배곧동을 개발하는 등 어떻게든 타 시 편입 및 시 해체를 막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행정구역 개편 떡밥이 나올 때마다 시흥시는 경기도 서남부 권역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주황 - 구 소래읍 (인천군→부천군→시흥군)
녹색 - 구 군자면, 수암면 (안산군→시흥군)
파랑 - 안산시
재밌네요 다만 한가지 틀린게 있다면 목감동은 지역번호 0345를 썼습니다.
목감에서 나고자라고 현재 거주중인 83년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