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1900 ~ 1971)
하얀 손수건, 트럼펫, 벙긋벙긋 웃는 커다란 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걸걸하면서 멋드러진 음성,
그를 생각하면 너무도 즐거운 이미지뿐이지만,
루이 암스트롱 역시 대부분의 재즈 아티스트처럼
힘든 소년 시절을 겪었다. 다행히 교도소에서
코넷을 배운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고, 결국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보컬 뿐 아니라 음악의 모든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새치모(Satchmo, 또는 Satchelmouth, 입이 크다는 뜻)'
라고 부르며 희극적인 공연을 많이 했으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2.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1899 ~ 1974)
듀크(공작이란 뜻)는 그의 별명이다.
그의 별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그의 귀족적이고 남다른
출신 배경에서 연유했다는 해석이다. 듀크 엘링턴은
당시의 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워낙에 품행이 단정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듀크 엘링턴 본인의 이야기 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는 듯 하다.
"학창 시절 멋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녀석이 자기랑
함께 다니려면 그에 걸맞는 별명이 있어야
한다면서 '공'이라고 부르곤 했거든.
그 다음부턴 내 별명이 공작이 되었지."
사연이야 어떻든, 듀크 엘링턴의 음악 인생은
그의 별명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빅밴드의 리더였던
그는 클래시컬하고 고급스러운 피아노 연주를 즐겼고
매너도 좋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코튼 클럽에 등장한 이후 거의 50년 간
갈채와 칭송을 받았다. '나의 밴드(오케스트라)가 나의 악기'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는 자신의 밴드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색했고 많은 앨범을 남겼다.
3. 레스터 영 (Lester Young, 1909 ~ 1959)
어린 시절의 찰리 파커와 존 콜트레인은 레스터 영을
우상으로 받아들였다. 포 브라더스 당시의 스탄 게츠와
주트 심스 역시 레스터 영의 추종자였다. 레스터 영의
색소폰 연주는 당시 인기를 끌던 콜맨 호킨스와는 달리,
의아할 정도로 부드럽고 여유가 있었다. 레스터 영을
테너 색소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면 콜맨 호킨스는
테너 색소폰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테너 색소폰의
세계를 열었던 것으로 유명한 콜맨 호킨스의 연주는
그만큼 호탕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레스터 영,
벤 웹스터와 함께 3대 테너 주자로 명성을 떨쳤다.)
뜨겁고 열정적인 연주가 유행하던 당시에 있어서
레스터의 등장은 그야말로 '쿨(Cool)'한 것이었고,
훗날 (강렬하고 자극적인 전통재즈에 비해) 부드럽고
서정적이며 주로 백인 연주자들에 의해 발전된
'쿨재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누구보다도 레스터 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으로는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를 꼽을 수 있다. 레스터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 빌리는 그를 '색소폰의 대통령(Prez)'이라고 불렀고,
레스터는 이미 '레이디'라는 호칭이 붙어다니던
빌리에게 더국 친근한 느낌인 '레이디 데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4.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1915 ~ 1959)
비참한 10대를 보낸 빌리는 뉴욕의 할렘가
싸구려 술집에서 가수로 일하게 된다. 우수에 젖은
독특한 목소리로 베니 굿맨, 레스터 영, 루이 암스트롱,
카운트 베이시 등과 공연을 하며 명성을 쌓은 그녀는
기품 있는 태도로 '레이디 데이'라는 칭송을 받을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화려했던 그녀의 인생
뒤편에는 인종 차별, 남편의 학대, 사랑의 상처,
음반사의 착취, 마약 중독 등의 어두운 그림자가
쉬임없이 따라다녔다. 결국 빌리 홀리데이는
1959년 44세의 때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찰리 파커 (Charlie Parker, 1920 ~ 1955)
찰리 파커는 재즈 역사에 있어서 거의 신적인 존재다.
비밥의 선두주자이고 화려하고 빠른 속주에서 가히 천재적이었다.
그는 귀에 들려오는 리듬은 장르를 불문하고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듣는 것을 그대로 연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 식으로 재창조할 수도 있었다. 한 마디로
찰리 파커는 비밥의 아마데우스였다. 그래서 처음 '버드'라는
파커의 별명을 들었을 때는 뭔가 대단한 뜻을
내포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천재 뮤지션의
그 엄청난 속주 실력을 훨훨 나는 새에 비유한 것이겠지 하고.
그런데 빌 크로우(베이스 연주자)가 쓴 책의 일화에 따르면,
'버드'는 그렇게 낭만적인 이유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다.
어느날 제이 맥샨(당시 챨리가 일하던 밴드의 리더)과
찰리 파커가 타고 가던 자동차가 닭을 치고 말았다.
찰리는 그냥 지나가려는 운전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죽은 닭을 여관 주인에게 가져갔다.
"저녁에 먹을 수 있게 요리해줘."라며. 이 일이 있은 후
찰리의 별명이 된 '야드버드(Yardbird)'가 다시 짧게 줄어
'버드'가 됐다는 것. 허탈한 일화다. 내가 줄곧
상상해 오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재즈라는 음악의 특성을 '규정지을 수 없는 자유로움'이라고
정의한다면 버드의 일화야말로 가장
재즈적인 유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강모림의 재즈 플래닛 中
6. 카운트 베이시 (Count Basie, 1904 ~ 1984)
옛날 사람들은 특이한 정취라든가 풍류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재즈 뮤지션의 이름이나 별명을 보면
그런 점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를테면 리 리트너가
'캡틴 핑거(Captain Finger)'로 불리우지만
이는 테크닉을 지칭하는 것이지 그 인간성이나
멋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작'이란 뜻의
듀크 엘링턴이나 '백작'이라는 뜻의 카운트 베이시는 어떤가.
벌써 이름만으로도 온후한 인간미라든가 깍듯한 예의범절이 느껴진다.
빅밴드 시절 '공작'하고 쌍벽을 이뤘던 '백작'은 일본에서
특히 명성이 높은데, 아마 1963년 이후 자주
일본을 방문한 데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을 본딴
재즈 카페가 명소가 될 정도이니 확실히 일본인들을
매료시키는 마력이 있었던 것이다. 카운트의 빅밴드 음악은
앙상블을 강조하는 듀크와는 달리 개개인의 기량과
재능을 살리는 쪽이어서, 밴드의 분위기도 다소 자유로왔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한 음악을 많이 만들어냈다.
카운트는 찰리 파커를 배출한 재즈의 고장이기도 한
캔사스 시티 재즈의 선봉이 된다. 카운트 악단을 거쳐간
멤버는 영원한 카운트의 사람이다. 그의 사후에도 악단은
해체되지 않고 테드 존스라든가 프랭크 포스터에 의해 운영되었다.
7. 캐논볼 애덜리 (Julian Cannoball Adderley, 1928 ~ 1975)
1955년 뉴욕, 앨토 색소폰 하나만 달랑 들고
다소 어수룩한 표정으로 나타난 한 명의 재즈맨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뚱뜽한 몸집에
커다란 콧수염이 난 이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는
제2의 찰리 파커, 이른바 '뉴 버드'라는 호칭을 얻으며
재즈계의 화제가 된다. 그가 바로 줄리앙 캐논볼 애덜리이다.
여기서 캐논볼은 별명이다. 혹자는 마치 대포처럼
커다른 음량으로 미친 듯이 불어젖히는 애덜리의 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캐논볼 애덜리는 오히려 다소 쓸쓸할 정도로
고독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발라드한 연주의 명수이고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뒷면에서 받쳐주는 데에
만족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렇다. 원래 그의
어릴 적 별명은 식인종이라는 뜻의 캐니벌(Cannibal)이었다.
아마 뚱보의 체격을 보아 닥치는 대로 주워먹는 식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이 와전되어
결국 캐논볼이 된 것이다.
-이종학의 재즈 속으로 中
8. 디지 길레스피 (Dizzy Gillespie, 1917 ~ 1993)
현기증 나게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디지'는
존 벅스 길레스피(John Birks Gillespie)라는 본명으로 그는
미국 남캐롤라이나 셰로우에서 태어났다.
천부적인 광대 기질로 트럼펫 연주를 구사한 길레스피는
밥(Bop) 음악과 아프로 쿠반(Afro-cuban) 음악을 창시하고,
1993년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즈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길레스피는 밥의 혁명을 찰리 파커와 함께 추진했으며
이후 많은 뮤지션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친
재즈계의 거인으로 손꼽힌다. '어지럽다'라고 느낄만큼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그의 스타일 덕분에 길레스피는
본명보다 별명인 '디지'와 합쳐진 디지 길레스피로 많이 불린다.
가끔 디지 길레스피가 본명인줄 아는 사람이 있긴한데
엄연히 본명은 따로 있다.
출처-jeyyoung.com
흑인 음악가 밭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