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회계사였던 앙드레 밤베르스키는 1982년, 자신의 딸 칼린카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칼린카는 앙드레의 전 부인 집에서 사망했다. 전 부인은 독일인 의사 디터 크롬바흐와 재혼하여 독일에서 살고 있었다.
건강하던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앙드레는 바로 독일로 건너가 부검을 요청했다.
부검 결과, 명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칼린카의 몸에서 주사자국들이 발견되었으며 생식기 주변에 피와 함께 하얀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앙드레는 범인이 딸에게 약물을 주사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했다고 확신하고 독일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조사 진행 중에 크롬바흐는 빈혈 증세가 있는 칼린카에게 자신이 철분제를 주사했다고 인정했다. 그 철분제 성분은 사망까지 일으킬 수 있는 약물이었으나, 독일 수사관들은 해당 약물과 칼린카의 죽음을 연관지을 증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지었다.
성폭행 여부는 부검 당시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으며, 부검 도중 생식기를 제거해버려 재조사가 불가능했다.
기나긴 법정싸움 끝에, 결국 독일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크롬바흐가 무죄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앙드레는 포기하지 않았다. 칼린카의 시신을 프랑스로 가져온 앙드레는 프랑스에서 재조사를 의뢰했다. 부검 결과 생식기가 제거되어 성폭행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크롬바흐가 주사한 철분제가 칼린카를 사망에 이르게 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에서 별도의 재판이 열렸고, 크롬바흐는 출석을 거부했다. 결국 프랑스는 피고인이 없는 상태로 재판을 열었고, 크롬바흐의 살인죄를 인정하여 15년형을 선고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범죄자 인도 요청을 했으나, 독일은 이미 자국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기 때문에 인도를 거부했다. 독일에 숨어있는 크롬바흐에게 형을 집행할 방법은 없었다.
몇 년 후, 크롬바흐는 독일에서 다른 16세 여성을 마취시키고 성폭행하여 유죄 판결을 받고 의사 면허를 잃었다. 그 후 무면허로 의료 행위를 하다가 걸려서 또 다시 전과자가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앙드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독일 정부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으나 번번이 기각되었다. 앙드레는 주기적으로 독일을 방문하며 크롬바흐가 이사할 때마다 그의 주소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살인죄 공소시효 30년이 지나는 2012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칼린카가 죽은 지 27년이 지난 2009년, 앙드레는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앙드레는 크롬바흐를 납치하기 위해 코소보인 A를 고용했다. A는 앙드레의 사연을 듣더니, 그런 좋은 일이라면 돈을 받지 않고 해주겠다고 말했다.
A는 독일 린다우에서 크롬바흐를 납치한 후 자동차에 실었다. A는 독일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경유하여 프랑스에 도착했다. A는 밧줄로 포박한 크롬바흐를 뮐루즈 법정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2011년, 프랑스 법원은 크롬바흐에게 예전에 내렸던 판결과 동일한 15년형을 선고했다.
독일은 자국에서 납치를 실행한 A와 앙드레를 독일로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이번엔 프랑스가 인도를 거부할 차례였다. 앙드레는 납치를 사주한 혐의로 2014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납치범 A는 1년형을 선고받았다.
앙드레 "직접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꼭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다.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 마지막 싸움을 딸에게 바치고 싶다."
멋지다. 나 같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