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사쓰마번의 국부 시마즈 히사마쓰는 막부를 개혁한다는 의지를 내걸고 700명의 무리로
막부가 있는 에도를 향했다.
막부를 개혁하는 것이라 주체는 막부가 되어야 했지만
앞서 등장한 시마즈 히사마쓰와 조정의 관료들이 주체가 되어 억지로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시마즈 히사마쓰는 개혁을 어느정도 끝마치고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와 함께 교토로 돌아갈 단계가 되었다.
이들은 오하라의 일행보다 하루 앞서 8월 21일 에도를 출발했다. 이때 인솔한 군대는 400여명 정도였다.
이들은 나마무기 마을(지금의 후쿠오카현 야메시)에 접어들면서 말을 탄 영국인 일행을 만났다.
영국인 일행들은 요코하마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근무하던
우톱프 찰스 클라크(Woodthorpe Charls Clark)와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비단 상인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l),
마샬의 사촌으로 홍콩에 거주하던 영국 상인의 아내이자 요코하마에 관광을 하러 와 있던
마가렛 보라데일 부인(Margaret Watson Borradail),
그리고 상하이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고 있다가 역시 관광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Charles Lennox Richardson) 일행이었다.
일행은 이날 도카이도에서 승마를 즐기다가, 관광 목적으로 헤에켄지(平間寺)로 향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나마무기 마을 주민 신고서와 가나가와 봉행소 관리의 각서, 그리고 당시 영국공사관 통역견습이었던
어네스트 사토의 일기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경위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먼저 행렬의 선두에 섰던 사쓰마의 번사들은 앞에 오는 영국인 행렬의 무리를 보고
말에서 내릴 것을 몸짓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영국인 일행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옆으로 지나가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
행렬은 많았고 길은 좁았으므로 영국인 일행의 무리가 시마즈가 탄 가마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다.
분위기는 험악해졌지만 영국인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말이 거칠게 몸부림치는 상황까지 오게되었다.
4명은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리처드슨은 중상을 입었다.
마샬과 클라크도 중상을 입고 보라데일 부인에게
“당신을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말을 버리고 도망가라”고 외쳤다.
보라데일 부인도 일격을 당했지만, 모자와 머리의 일부가 날아간 그대로,
가장 먼저 요코하마 거류지로 달려 돌아와 구원을 호소했다.
마샬과 클라크는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타고
가나가와에 당시 미국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혼가쿠지(本覚寺)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했고,
헵번 박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은 이전에 있었던 외국인 살해 사건과는 궤를 달리하는 사건이었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다이묘 행렬의 다수가 연루된 사건이었므로
각국 공사,영사들과 해군장교, 거류민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영국공사관 부속 의관이었던 윌리엄 윌리스였다.
한편 막부의 봉행은 사건의 해명을 사쓰마 번에 요구했고
사쓰마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 낭인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 사쓰마와는 관계없음 "이라고 하여 얼버무리는 태도를 보였다.
막부는 분노하여 저택 집사에게 출두를 명했지만 사쓰마 측은 무시로 일관했다.
이것도 모자라 막부에 탄원서 까지 넣게 되는데 " 영국인의 무례가 심해 참을 수 없어 베었다" 는 것이었다.
외교상 자국에 유리한 막부의 과실을 지적했다.
여기서도 영국 측은 범인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하지만 사쓰마번과의 협력은 결렬되었고
결국 일개 번에 불과한 사쓰마번과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4개국 함대와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