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내용이라 책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THE TWO KOREA (두 개의 한국)
저자: 로버트 칼린, 돈 오버도퍼
로버트 칼린: 1971~1989년 미 중앙정보부(CIA) 분석관, 1989~2002년 CIA 동북아 담당 국장
돈 오버도퍼: 6.25 참전용사, 미 국방부 자문위원, 워싱턴포스트 기자
책 차례: 제3장 7파트 남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119p~126p
남한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전
1970년대가 시작되던 당시에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닉슨 대통령은 '닉슨독트린'을 전세계에 천명한다.
내용은 간단하였는데
아시아에서 생기는 내전과 침략은 핵위협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해결하라는 선언문이었다.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만나서 유명한 '핑퐁외교'를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행보로 박정희 정부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강대국 간의 평화를 위해 약소국의 평화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특히 박정희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 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자 박정희 정부는 현재 남한군의 낙후된 무기와 장비만을 가지고는
북한과 소련, 중국 공산군으로부터 '자주국방'을 이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된다.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1972년 비밀리에 프랑스 정부와 접촉한다.
당시 프랑스는 핵보유 국가였고 미국 중심의 나토(NATO)에서 벗어나려 하는 등 미국과 상당한 마찰을 겪는 중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미국 영국과는 달리 핵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시큰둥하였다.
프랑스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재처리 시설의 장비와 설계도가 완성된다.
이것을 통해서 매년 20kg 상당의 핵분열성 플루토늄을 제조할 수 있게 되고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핵과 맞먹는 핵폭탄 2기를 제조할 수 있는 시설의 설계도였다.
그런데 1974년 1세계도 아니고 2세계도 아닌
3세계 개발도상국이던 인도에서 핵실험에 성공한다.
3세계이던 국가에서조차 핵을 보유하게 되자
전세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핵확산 저지에 거의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된다.
미 정부는 핵무기 개발 관련 자재의 세계 유통 흐름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런 대부분 자재들이 현재 대한민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1974년 11월 주한대사관은 본국에 급히 타전하였다.
"대한민국이 핵개발 계획의 제1단계를 추진하고 있다"
"10년 이내에 제한적 핵무기를 개발하고 이를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할 것이다"
"이로 인해 주변 국가에 심각한 정치적 파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정부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
남한의 핵개발이 자칫 동북아의 핵확산의 시발점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이는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라고 말하였다.
"남한의 핵무기 보유는 특히 일본과 북한을 자극할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안보정책을 불신하고
동시에 동북아에서 군사적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박정희의 염원이 반영되는 복잡성을 띄고 있다"
헨리 키신저는 남한 핵개발과 핵무기 운반 체제 능력을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월남전 이후 세계적으로 떨어진 미국의 신용도와 연관하여
한미관계를 훼손치 않고 핵개발을 저지해야 한다는 임무였다.
1975년 6월
박정희는 칼럼리스트 로버트 노박과의 인터뷰에서
남한은 핵무기 개발 능력을 이미 보유했지만 계획에는 착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된다면 우리는 핵개발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적극 부인하였다.
남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스나이더 대사는
한미관계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처 장관, 외무장관, 최종적으로 비서실장의 순서로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여기서 미국이 남한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알고 있다는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았고 최대한 간접적으로 재처리 시설을 들여오면 미국은 달갑지 않다는 식의 전달문이었다.
스나이더 대사는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한 프랑스 대사였던 피에르 랑디와 만나서
미국은 프랑스가 남한이 플루토늄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간접적으로 강력한 경고를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대사는 남한이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린 재처리 시설과 핵 기술 전달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1975년 8월 미 국방장관이던 제임스 슐레진저는 한국에 방문했다.
슐레진저는 남한이 핵개발을 추진할 경우 한미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경고는 미국이 남한 핵개발을 이미 알고 있음을 말하지 않은 간접적 경고였지만
슐레진저의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미 미국이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챘음을 아는 듯 했다고 술회했다.
스나이더 대사의 후임으로 필립 하비브가 오게 된다.
그는 함병춘 주미 대사와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필립은 함병춘에게 프랑스 재처리 시설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고
함병춘은 이는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이므로 약속을 취소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미국 정부는 박정희 정부가 프랑스와의 계약을 취소한다면
그에 합당한 인센티브를 줄 것으로 회유책을 꺼내든다.
만약 이러한 당근을 받지 않는다면 의회의 도움을 얻어
한국을 제재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말하자면 남한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한다면
한미관계가 전면적인 파탄에 이를 수 있다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미국 정부의 지원과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선택할 것인가"
"프랑스 재처리 플랜트에 대한 이익을 선택할 것인가?"
"남한 정부는 미국의 각종 최신 기술과 금융지원을 포기할 각오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제임스 슐레진저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도널드 럼즈펠드는
1976년 5월 남한의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강행한다면
모든 한미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경고한다.
미국의 직접적인 경고에 결국 박정희는 프랑스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스나이더는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에게
박정희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확보하여
국가의 자주성을 이룩하고자 하는 박정희의 열망과 의지가
미국과 한국의 장래관계에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고 말했다.
혹시라도 훗날 또 박정희의 계획이 부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에게 핵개발을 결코 하지 말라 거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정희는 반강제적으로
프랑스제 재처리 플랜트와 훗날 구입할 예정이었던 캐나다제 신형 중수로 계약을 취소한다.
그럼에도 핵무기 확보에 대한 의지는 버리지 않았고
핵무기 개발팀을 해산시키기는커녕
한국핵연료개발공사라는 새로운 기구로 흡수시킨 후
발전용 원자로에서 사용할 핵연료봉을 제조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또한 박정희는 또다시 1978년 프랑스와 재처리 시설에 관한 협의를 재개한다.
[지미 카터, 지스카르 데스탱 Giscard d' Estaing]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은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담판을 짓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집요한 방해에도
남한 핵개발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고
전임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련은 1979년 1월에 박정희가
1981년 상반기까지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책에서도 진의가 의심되는 부분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1981년 국군의 날 행사에 핵무기를 세계만방에 공개한 후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털어놓았단 주장이었다.
"김일성이 감히 남침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강창성 보안사령관도 이런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었는데
박정희가 자신에게 핵무기 개발의 95%가 완료됐으며
1981년 상반기부터 핵무기 생산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주장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로부터 암살당하면서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도 유신 헌법의 존재때문에
공화당 독재는 여전할 것이고 박정희가 퇴임하더라도
대통령이나 다름 없는 상왕 노릇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이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전두환은 핵연료개발공사를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꾸고
핵개발에 참여한 조직과 인물들은 '일시적으로' 전원 와해되었다.
새로 권력을 잡은 군부독재자 답게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국은 핵개발을 하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박정희의 핵개발로 냉각되던 한미관계가
80년대 초반 소련과의 냉전격화와 맞물려
정치군사적으로 한미관계가 상당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레이건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43000명 수준으로 증원시키고
당시 최신예 F-16 전투기를 한국에 판매하고
한국군 현대화에 이바지하겠단 것을 포함하여
전두환에 정권에 대한 보답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의 무리한 핵개발은 한미관계를 크게 악화시키고
북한과 일본에 연쇄 핵확산을 일으키는 동북아 심각한 안보상황을 초래할 뻔하였다.
동시에 한국의 원자력 발전과
마음만 먹으면 즉시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국가에 입성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핵생산에 성공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스라엘처럼 암묵적 승인을 받거나
엄청난 제재를 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후자가 더 유력하니
핵개발능력만 갖추고 실제 생산까진 가지 않은 것은 다행으로 볼 수 있다.
4줄요약
1. 박정희가 핵개발을 시작함
2. 미국이 그걸 저지하는데 큰 노력을 함
3. 일단 핵생산까지 도달하진 못하고 프로젝트는 종료됨
4. 다만 현재 한국이 빠른시일내에 핵개발 능력을 갖추는 것에 도움을 줌
* 책에 나온 참고자료 (859p)
주한 美 대사관의 1급 기밀 본국 타전 Dos cable, ROK plans to Develop Nuclear Weapons and Missiles (1997년 해제)
남한 정부를 설득하라는 국가안보회의 회의록 Memorandum for Secretary Kissinger, Jan M, Lodal. Lodal and Dave Eliot 2급 기밀 (1995년 해제)
스나이더의 지적 Emb. cable (1996년 해제)
결말이 내생각과 조금 다른게 핵개발은 자주국방을 위한 어쩔수없는 선택이였고 그결과 박정희는 죽었지만 핵으로 미국과 딜을 할수있는 전두환에게 발판을 마련해줬으며 지금의 고급 원자로 기술보유국으로 발전할수있는 초석이 되었다고도 판단할수 있지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