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년 여러 명의 선교사들이 페르시아로부터 당나라의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는데, 중국인들은 그들의 신앙 및 사상을 경교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그리스도의 이인격설(二人格說)을 주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마리아 신모설(神母說)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교권파인 시릴(Cyril) 일파에게 몰려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정죄되어 이집트에서 유배생활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을 신봉하던 사람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개척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페르시아의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이슬람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네스토리우스교인들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태종(太宗) 때였으므로 각 지역의 문화와 종교가 모두 포용될 수 있었고, 네스토리우스교도 경교로서 수용되어 폭넓게 전파되었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635년은 신라의 선덕여왕 2년, 고구려의 영류왕 18년, 백제의 무왕 36년에 해당하며, 경교의 중국 전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진 781년은 통일신라의 선덕왕 2년에 해당된다.
일본 문헌인 『속일본서기 續日本書紀』 성무천황기(聖武天皇紀)를 보더라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고, 남만주에서도 1928년에 경교도의 분묘와 7개의 와제(瓦製) 경교 십자가, 그리고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경배도가 조각된 바위 등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만주지역에서의 경교의 영향력은 한반도에서도 입증되었는데, 1956년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중 석제 십자가, 동제 십자가와 더불어 마리아관음상 등이 발견되어 경교적인 흔적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경교전래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동점사(基督敎東漸史)의 권위자인 고든(Gordon,E.A.)이 우리 나라의 경교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7년 금강산 장안사 부근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비를 세웠는데, 흑대리석이 아니고 백대리석인 점에서 원래의 비와 다를 뿐이다. 이것을 목사 김양선(金良善)이 탁본하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해 놓았다.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경교의 구실 때문에 기독교의 한국 전래는 통일신라시대로 소급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