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717~718)
한국에서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 역사적 중요도에 비해 많이 안 알려진 공방전.
15000명 이하의 수비대가 지키는 콘스탄티노플을 12만~20만에 달하는 이슬람군이 13개월(717.7.15~718.8.15) 포위한 전투.
당시 엄청난 팽창을 이룩하고 있던 이슬람 제국은, 드디어 동로마제국의 수도, 유럽의 교두보인 콘스탄티노플을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
동로마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시민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을 정도로 상황이 암울해 보였음.
(이미 전쟁을 이겼다고 생각한 이슬람 제국은 거절.)
그러나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고 겨울이 찾아와 기근이 찾아왔고, 전염병이 돌기 시작.
물론 이슬람군 역시도 장기전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굉장히 많은 식량을 준비해서 왔지만,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여 온 대지가 눈에 뒤덮였고, 주변에 약탈할 식량도 마땅치 않았으며
식물들도 추위에 죽어버려 나무껍질 먹기도 힘들었던 상황.
거기다 이 와중에 이들을 지원하러 보낸 해군의 선원이 대다수 기독교인 노예였던 관계로, 중간에 탈주하여
오히려 보급품이 동로마 해군의 손에 들어갔고, 육로로 보낸 보급품 및 원군은 니코메디아 남쪽의 소폰에서 동로마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
거기다 일전에 동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불가르족의 군대가 약속을 지키기위해 아랍군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더더욱 전황이 불리해졌음.
아랍군은 계속 공성전을 벌였으나 13개월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결국 철군.
그리고 철군하는 도중에 하필이면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
후퇴하던 함대는 폭발의 영향으로 모조리 침몰하고 오로지 5척의 배만 시리아로 복귀할 수 있었음.
아랍측 기록에 따르면 이 공방전으로 인해 약 15만명이 사망했으며,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는 이 패배의 여파로 반란에 직면,
멸망하고 압바스 왕조가 세워지기까지 하며 이슬람 제국의 팽창은 여기서 한동안 멈추게 됨.
여기서 이슬람이 승리했다면, 유럽 전역이 이슬람 문명권으로 변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되고 있는 대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