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본에 나라를 판 친일파라고 하면 이완용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완용보다 훨씬 악질적인 친일파도 있었으니, 그 이름이 다소 생소한 배정자입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 밀양부의 아전인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년 후인 1873년 배지홍이 역모의 혐의를 쓰고 처형당하자 배정자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배지홍의 친구인 동래부사 정병화와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1885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으로 간 배정자는 훗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 그의 수양딸이 되었는데, 이토가 워낙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었기에 사실은 애인 관계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집에 하녀로 들어와 살면서 일본을 위해 일하는 첩보원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894년 조선의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하는 조선어 통역관으로 조선으로 건너갔습니다. 배정자는 조선의 왕족이나 대신 같은 상류 계층들과 만나면서 친분을 맺었고, 고종 임금과도 만나 깊은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배정자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였습니다. 그녀는 조선의 정보를 빼돌려 일본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는데, 고종이 러일전쟁 직전 일본의 압박을 피해 러시아의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 한다는 계획을 미리 알아내어 일본 공사관에 전달했고, 그래서 일본 정부가 재빨리 손을 써서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막아버렸습니다.
또한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들을 보내 국제 사회에 일본의 국권 침탈을 고발한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배정자는 한국 정부의 내부에서 첩보 활동을 벌여 일본 정부에 이 사건의 내막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들의 압력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배정자가 가장 사랑하던 연인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배정자는 너무나 슬퍼서 자리에 드러눕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헌데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킨 경술국치의 소식이 알려지자, 배정자는 미친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배정자는 다시 힘을 내어 일본을 위해 스파이 노릇에 나섰습니다. 조선을 삼킨 일본이 중국의 만주 지역까지 넘보자, 배정자는 만주로 가서는 현지의 마적단 두목의 첩이 되어서는 그 정보를 빼내어 일본군에 알려주는 일까지 했습니다. 아울러 만주로 달아나 독립운동을 벌이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도 알아내어 조선총독부에 알려주는 일도 맡았습니다.
또한 1941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자신이 직접 1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넘기는 파렴치한 짓도 벌였습니다.
배정자는 방탕한 성생활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공식적으로만 3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57세의 나이에도 20세나 어린 조선인 순사와 동거를 할 만큼 남자를 무척이나 밝혔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자 배정자는 자신이 했던 일이 겁이 나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1948년 친일파들을 찾아내 처벌하는 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배정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이때 배정자는 자신의 죄상을 묻는 질문에 옛날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난다고 시치미를 뗐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던지 곁에서 보고 있던 그녀의 젊은 손자가 죄를 시인하고 잘못을 빌라며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유감스럽게도 1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가 이승만의 명령으로 해산되자 배정자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79세의 노인인데다 일제가 망하면서 모든 재산을 잃은 빈털터리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2년 후인 1951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출처: 어메이징 한국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38~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