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문명/역사
2023.11.09 02:16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조회 수 51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기사단장 죽이기.jp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2016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왔을 때, 일본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루키 작품의 문학성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이 소설에 난징 대학살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쪽의 질타는 굉장했다. '노벨 상을 받기 위해 중국 쪽 지지를 얻기 위해 조국을 팔았다'라는 강도 높은 비난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소신을 지켰고, 앞으로도 잘못된 과거사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근데 이런 의문이 들긴 한다. 왜 굳이 난징 대학살이었을까? 

 

 

 

노르웨이의 숲.jp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사실 하루키가 처음부터 이런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의 '감정'에 더 집중하는 작가였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하루키 붐'을 일으킨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당시 한국의 90년대 학번들에게 하루키는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히트를 쳤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 좌익 운동의 절정이었던 68학번 출신이고 이 소설 또한 시대적 배경이 그때의 시기인데 사회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개인에 너무 집중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옴진리교 테러.jp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항상 개인에 중점을 두던 그의 소설은 하루키가 여러 국내외 사건들을 겪게 되면서 점차 사회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항상 고독한 '나'를 다루던 하루키는 걸프 전쟁의 모습과, 1990년대 중후반 일본을 뒤흔든 옴진리교 사건을 겪게 되면서 자신의 작품 노선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동안 무심함(detachment)를 중요시했던 그의 작품은 책임감(commitment)을 중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에 옴진리교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기도 하고, 2009년 예루살렘의 시상식에 참여해서 상당히 강력한 발언을 하는 등 작가가 사회에 가져야 할 책임감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따라서 <기사단장 죽이기>도 이와 같은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일종의 고백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

 

 

고양이를 버리다.jp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시리즈를 출간한 다음 2019년 5월에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 에세이는 그동안 하루키가 다루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을 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회상하는 내용이 주가 되는데, 그 중 가장 독자들의 눈을 끌었던 것은 아버지가 하루키가 어렸을 때 자신이 속했던 부대가 중국인 포로를 군도로 목을 자르면서 처형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줬다는 대목이다.

 

 이는 하루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내가 가해자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은 하루키를 괴롭혔다. 그래서 하루키가 성장한 다음에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작가가 된 이후에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2008년에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만나서 화해를 했다.

 

난징 대학살.jp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하루키는 그동안 아버지의 과거를 마주하지 못했던 공포를 딛고,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하루키의 아버지는 난징 대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난징 대학살을 벌인 부대에 10개월 뒤에 보급 담당 부대로 배속되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고, 중국인 포로를 처형하는 모습은 전쟁 중에 목격한 것일 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하루키의 오해는 풀렸다. 이제 자신의 짐도 덜었고, 이대로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난징 대학살의 이야기를 밝혔을까.

 

하루키.png 유명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

 

 하루키의 아버지는 하루키가 어렸을 때 포로 처형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전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승려를 지망했던 그에게 전쟁은 큰 상처로 남았을테니까. 그러나 하루키에게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 어두운 역사가 묻히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그 뜻을 잇기 위해서 계속 어두운 과거사를 피해자의 입장으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어떤 나라든지 어두운 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이를 인정하며 반성하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의 난징 대학살 언급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하루키의 개인사를 고백한 소설이었다. 이제 가족의 그림자까지도 받아들인 이 위대한 작가의 다음 소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까.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는 광대한 대지로 떨어지는 엄청나게 많은 빗방울 가운데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소중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기준 추천수 이상이 되면 아이콘을 가지게 됩니다.

김짤닷컴에서는 도배 및 무성의 댓글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길시 무통보 7일 차단이 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833 사고/이슈 이쯤 되면 확산하고있는 음모론 (feat. 이스라엘) 재력이창의력 2024.10.02 206
14832 문명/역사 롯데타워 초기 디자인 컨셉들 ㄷㄷ 꾸준함이진리 2024.09.30 357
14831 미스테리/미재 당뇨병 근황 꾸준함이진리 2024.09.30 335
14830 사고/이슈 이탈리아 철도 검표원 근황 10 file 꾸준함이진리 2024.09.29 763
14829 미스테리/미재 미국 국방부, 중국 핵잠수함 침몰 오피셜 꾸준함이진리 2024.09.28 569
14828 문명/역사 개교기념일이 아닌 폐교개념일이 있는 학교 1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65
14827 사고/이슈 헬기 하나 홀라당 태워먹은 러시아 고등학생들 2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96
14826 문명/역사 (펌) 나폴레옹 키에 대한 오해 file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45
14825 문명/역사 첫 대면에서 사마의가 어떤 인물인지 간파한 조조 file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71
14824 우주/과학 태양에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될까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41
14823 문명/역사 중국의 혐성질에 빡친 이탈리아 1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59
14822 기타지식 농업만으로 선진국 거의 불가능이라 하는 이유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33
14821 문명/역사 브라질 " 중국과 협력해 우크라이나에 평화 플랜 제시 " 꾸준함이진리 2024.09.28 353
14820 사고/이슈 17년 간 아동 강간 살인범으로 살았던 남자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01
14819 문명/역사 1952년 올림픽 높이뛰기 스웨덴 국가대표 미모 클래스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31
14818 문명/역사 ㅇㅎ? 당나라 황제가 정무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이유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79
14817 사고/이슈 북한 사형 죄목 추가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32
14816 문명/역사 사이프러스 나무를 사랑한 화가 꾸준함이진리 2024.09.28 371
14815 사고/이슈 미국에서 실수하면 겪는 댓가 file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34
14814 기타지식 식량안보가 대두되는 이유... 꾸준함이진리 2024.09.28 373
14813 우주/과학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아그라 같은 물건 꾸준함이진리 2024.09.28 422
14812 기타지식 2024 공공기관 연봉 순위 꾸준함이진리 2024.09.28 393
14811 미스테리/미재 나스카 지상화 303점 추가 발견 꾸준함이진리 2024.09.26 496
14810 문명/역사 내 몸을 망치는 양반다리 좌식문화 file 꾸준함이진리 2024.09.25 547
14809 문명/역사 강감찬의 친필이 새겨진 천년 고탑 꾸준함이진리 2024.09.25 56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94 Next
/ 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