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은 국군과 UN군에 있어 최고의 기간이었다.
국군은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하면서 쾌속 진격하여 19일에 평양에 입성했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6사단 장병)
26일에는 압록강에 도달하면서
통일이 그야말로 눈 앞에 온 듯 했다.
(중공군 포로들)
그러나 전날부터 전방 곳곳에서 불길한 징후가 포착됐다.
국군 1사단은 1950년 10월 25일, 운산 방향으로 진격하던 중 의문의 적과 조우했다.
화력도, 전투태세도 인민군과는 달랐고
무엇보다 붙잡힌 포로가 중국어를 하고 있었다.
(1사단장 백선엽 준장)
중국어 회화가 가능한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포로를 심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포로의 입에선 약 수십만 규모의 중공 정규군이 이미 북한 북부에 진입해있으며
1사단 정면에도 약 2만명이 포진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중국의 개입이 수만명 규모의 의용군 수준일것이라던 UN군 사령부의 발표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토록 우려했던 중공군 전면 개입이 현실로 드러났다.
(백선엽과 밀번)
상급자인 미1군단장 밀번 소장은 이런 내용을 도쿄에 보고했으나
사령부에선 현장의 보고를 과장됐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중공군 대규모 개입은 사실이었으며
1사단 뿐만 아니라 압록강에 진출한 국군 6사단 역시 중공군과 접촉했다.
(미 1기병사단)
일선 부대들의 진격이 지지부진하자
미8군 지휘부는 미1기병사단을 진격시켰다.
10월 30일, 선봉인 8기병연대가 운산에 도착해
국군 12연대와 교대하면서 국군 15연대와 함께 전선을 형성했다.
(운산전투 당시 배치도)
문제는 미1군단 우측에 배치된 국군2군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면서
미8기병연대와 국군 15연대가 적을 향해 돌출된 모양새가 되었고
두 연대는 곧 포위됐다.
(중공군의 공세)
11월 1일 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됐고 15연대가 먼저 무너졌다.
8기병연대는 2대대▶1대대▶3대대 순으로 철수계획을 세웠으나
상황이 급박해지자 차량과 중화기를 버리고 퇴각을 시작했으며
결국 후위를 맡은 3대대는 퇴로를 차단당했다.
(미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은 5기병연대에 3대대 구출 명령을 하달했으나
5연대마저 포위당할 위험에 빠지자 결국 구출을 포기하고 철수한다.
양차 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던 게이 소장은
훗날 이 결정이 자신의 군 경력에서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운산 전투에서 고전하는 미군 병사들)
3대대는 약 500명 정도가 탈출에 실패해 진지를 사수하며 항전 중이었고
낙오한 2대대 병사 수십명이 이들과 합류했다.
11월 2일 오후, 항공기 전문 투하를 통해 3대대원들에게
구출 시도가 실패했으니 개별적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포로로 잡힌 미군)
3대대원들은 버텨보기로 했으나 탄약과 식량이 고갈됐고 남은 부대원 절반이 부상 당해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결국 4일, 마지막 탈출 시도가 실패하고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다.
3대대 병력 약 800명 중 살아서 본대에 합류한 인원은 200명에 불과했다.
운산 전투는 운산의 재앙(Disaster at Unsan)으로 불릴만큼 미군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전투였다.
(청천강 전투 중 중공군의 공격)
그러나 더 큰 재앙이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중공군의 전력을 얕잡아 보는 사령부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고
11월 24일, 맥아더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공세를 지시했다.
이로써 국군과 UN군은 수십만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는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야 말았다. (청천강 전투)
수십만 중공군 주둔지에 원자폭탄 한발만 떨궈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