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제브
무굴 제국의 6대 황제로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힌두교를 비롯한 이교도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으로 제국의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고도 평가받는 인물
'나쁜 황제' 아우랑제브 내러티브는
사실 영국 식민주의와 힌두 극우주의 사관에 의해 분명히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아우랑제브의 종교적인 독선(특히 인두세의 부과)과 잦은 원정 때문에
민심의 이반과 국가 재정의 치명적인 악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는데...
무굴 제국의 미래를 그가 소비한 것과 별도로
황제 자신은 사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그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함
나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칼을 들고 죽을 수도 있다.
아우랑제브는 본인의 일기에 위와 같은 맹세를 하였던 인물인데...
황제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해 '애민'의 관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어
아우랑제브는 거지가 없는 번영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고
가뭄으로 농민들이 굶주리면 무료 급식소를 세우고 음식과 곡물을 배급하는 정책을 폈지...
또한 황제는 곡물 운송과 판매에 붙는 세금을 면제하고 물가를 낮추도록 조치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아우랑제브의 애민주의적 신념이 정책으로도 반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일 것이야...
아우랑제브의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제국이었는데
1690년 무굴 제국의 GDP는 약 4억 5천 달러로 세계 1위였으며
아우랑제브의 조세 수입은 화려한 궁정 생활로 소문난 루이 14세가 이끄는 프랑스의 10배가 넘었어
하지만 그런 부유한 제국의 통치자 아우랑제브는 검소하였는데
황제는 금욕주의적 인물로 술과 마약은 물론 여색도 탐하지 않았지(앞선 황제들에게 수백 명의 여인들이 거주하는 하렘이 있던 것과 달리 아우랑제브는 이슬람법이 허용한 대로 네 명의 아내만 두었음)
아우랑제브의 삶은 무굴 제국의 선황들 그리고 동시대 많은 군주들의 화려한 삶과 분명히 달랐는데
황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국정을 살피다가 늦은 밤에야 잠이 들 정도로
그 일과는 단순하고 경건하며 엄격하였어
아우랑제브는 보석도 멀리하여 그의 장신구는 칼밖에 없었으며
프랑스인 여행가에 따르면 호랑이 가죽을 덮고 땅바닥에서 자는 생활을 했다고 해
또한 부유하고 거대한 제국의 통치자는 교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전에 꾸란의 구절을 새기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어
황제는 사람들이 꾸란의 구절을 새긴 동전을 만지고 밟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영광을 거절한 것인데
아우랑제브는 신실했던 인물로
전투를 하다가도 말에서 내려 메카를 향해 기도했으며
정기적으로 금식하면서 금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고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꾸란을 외우기 시작하여 7년 만에 그 모든 내용을 암송하여 부하들을 놀라게 하기도 함(넓은 제국을 다스리고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가면서 일군 성취였지...)
통치자의 금욕적인 태도는 분명히 미덕(사치로 나라를 말아먹은 여러 군주들을 볼 때)이지만...
문제는 아우랑제브의 이런 금욕주의가 스스로를 자제하는 것을 넘어 백성들에 대한 강요로도 이어진(아우랑제브는 일찍부터 이교도에 대한 차별의식이 강하기는 했지만... 즉위 초에는 분명히 이교도 백성들도 그의 애민의 대상에 포함되었어... 하지만 황제는 나이가 들수록 더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데... 그가 금욕적이 되면 될수록 이교도 백성들과 황제는 멀어졌다고 평가되기도 해) 것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금주령'이 있어
술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고, 안 보이는 사람을 볼 수 있게 한다. 약자를 강하게 하며 장애인에게 자신감을 준다.
아우랑제브의 금주령에 대해 한 신하는 위와 같이 술을 예찬함으로써 금주령에 대한 그 나름의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는데...
황제의 누이들(자하나라와 로샤나라)이 소문난 주당이란 점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지...
아우랑제브는 금주 정책을 결코 접지 않았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그의 사후 무굴 궁정에 와 있던 영국인 대사에 따르면 무굴 제국의 궁정에는 재상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 모두가 술에 취해 살았다고 전해져...
아우랑제브 당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인 마누치의 기록에 의하면 제국의 궁정에서 오직 두 명만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한 명은 황제이고 한 명은 이슬람 판사였어
하지만 그는 이슬람 판사는 은밀하게 술을 마신다고 덧붙였는데...
그에 따르면 사실상 궁정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황제 한 사람뿐이었던 셈 ㄷㄷㄷ
아우랑제브는 또한 궁정에서 음악도 금지하라고 지시(자신의 장례식에도 음악을 쓰지 말라고 유언함)하였는데
이는 선황들이 가무와 음악을 멀리하는 이슬람 전통을 깨고 힌두의 고전 음악을 장려하였던 것과 배치되는 것으로
관용적이었던 악바르의 시대 무굴 제국은 탄센과 같은 최고의 음악가를 배출하였지만
아우랑제브는 인간의 기본 욕구인 춤과 노래까지 금하면서 다수의 백성들과 멀어졌어
마누치는 악사들이 황제에게 단체 행동에 나선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들은 황제가 금요 사원으로 행진하는 길가 부근에 모여 구슬프게 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아우랑제브가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묻자
"폐하께서 음악을 죽이라고 명하셨기에 저희들이 지금 그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악사들이 대답하였다고 해
물론 황제는 녹록치 않아서
"그런가? 그렇다면 죽은 음악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죽은 음악을 잘 묻어 주라"
라고 대답하였다고 함...
아우랑제브는 이후 제국의 수도에서 공식적으로 음악을 금지하였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몰래 음악을 듣고 사적으로 악기를 연주했어
아우랑제브는 궁정에서 춤추는 방식이 힌두교의 우상숭배와 비슷하다고 하여 무용도 금하였으며
그의 제국에서 도박도 사라지길 원하였고
노예와 내시도 인정하지 않았지...
그는 제국을 거대한 도덕교실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결과는...
* 물론 술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도박을 즐기는 것, 노예나 내시를 부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은 아닐 것이지만...
*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통제하려던 아우랑제브의 여러 정책들은 분명히 많은 백성들을 적으로 돌렸고 거기서도 제국은 금이 갔어...
아우랑제브는
칼 이외의 장신구를 두지 않았지만 그 칼에 '이교도 살해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으며
황제 본인은 검소하였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관련한 개혁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였어...
애민정신은 가졌지만 결국 제국의 근간인 농민에게 좋은 지배자가 되지는 못하였는데
그의 치세 대다수 농민들은 곤궁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황제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지만 고동을 불며 깃발을 들고 거친 전쟁터를 누빈 제국의 군인들은 제때 봉급을 받지 못하기도 했지...
* 아우랑제브는 분명히 문무를 겸비하였고 영웅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는데... 그가 조금 더 넓은 포용력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 다만 상술하였듯이 아우랑제브에 대한 악평은 분명히 영국과 힌두 극우세력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는데... 실제로 아우랑제브는 수니파 무슬림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힌두교도 귀족들의 수를 늘리는 등 정치적 유연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므로 참고 요(그리고 사실 무슬림이건 이교도건 황제에게 도전하면 공평하게 박살냄 ㄷㄷㄷ)
* 글을 마칩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ㅊㅊ- https://www.fmkorea.com/best/8215520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