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가 되는 전 홍위병 나(羅)씨는 자신이 겪은 2년간의 심문의 모진 고통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심문은 공안부가 중국 중앙부 장시성 산간부에 세운 특별 감옥에서 행해졌다. 나씨는 진흙으로 지어진 오두막에 혼자 수감되었는데 안과 밖에는 경비원이 한 사람씩 경비를 맡았고, 그의 동정을 지켜보기 위해 밤에는 등잔불이 밤새도록 밝혀졌다. 나씨는 경비원은 물론 죄수들과도 말을 주고받는 것이 금지되었다. 2년 동안 그가 들은 목소리라고 하면 심문자의 목소리와 투쟁 대회에서 욕을 퍼붓는 죄수들의 목소리 뿐이었다.
나씨는 문화대혁명 절정기에 외무부를 점거한 과격파의 일원으로 고발을 당해 있었다. 그는 홍위병의 행동 중에서도 가장 센세이셔널한 이 외무부 점거에 참가한 것은 부정하지 않았으나, 이는 장칭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우겼다. 1972년 그가 구류되었을때,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써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던 린뱌오가 항공 사고로 막 죽었을 때였다. 그래서 공안부는 나씨에게 외무부 점거가 사실은 린뱌오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자백시키려 했던 것이다.
옥중 생활 2년 동안 그에 대한 심문은 언제나 네 명의 사나이- 공안부에서 2명, 외무부 안전국에서 2명-에 의해 실시되었다. 그들은 체포된 나씨를 베이징으로부터 기차로 쭉 호송해 왔다.
"그들의 심문은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리고 또 밤 8시부터 10시까지 매일 계속되었다. 배가 고플 때는 절대로 심문하러 오지 않았다."
"심문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서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캐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날조한 사건의 개요에 따라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부정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거부할 때마다 다른 죄를 자백시키기 위한 투쟁 대회에 처넣어졌다."
"투쟁대회는 때로는 돼지우리에서 실시되었다. 오물이 넘치는 바닥에 쪼그려 앉혀져서 머리를 짓눌러 분뇨 속에 처넣어졌다. 머리는 들게 해주지 않았다. 반동자는 긍지를 가져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무부 점거를 명령한 것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시작되었고, 장칭이라고 대답하자 다른 죄수들이 벌떡 일어나 마오 주석을 비방하는 자라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병들에게 태도가 나쁘다고 비난을 받투쟁대회에 처넣어지기 때문이다."
나씨는 자기도 참가한 투쟁대회에서 교무위원회의 전 간부가 자백을 거부한 이유로 심하게 맞고 있는 것을 상기했다.
"우리가 너무 심하게 그를 때리고 차고 했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또한 죄수 세 사람이 자살했는데, 이들은 고뇌와 굴욕을 끝까지 참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유리로 손목을 자르고, 또 한 사람은 칼로 손목을 잘랐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때마다 수용소장은 확성기로 '그들은 죄의 발각이 무서워서 죽었다' 라고 발표했다."
이러던 와중 어느 날 경비병이 와서 나씨의 석방을 알렸다.
"지금도 (석방이 결정된)이유는 모른다. 그들이 '너는 인민의 적이지만 태도는 좋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시발 럭키북한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