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월 26일 설날을 이틀 앞두고 있었다.
서울역은 고향으로 가는 귀성객들로 붐벼있었다.
한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에게 앞으로 다칠일들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서울역은 고향으로 가는 승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보다 3배 많은 승객들이 기차표를 예매했다.
오후 10시 15분경, 서울을 출발하여 목포를 향하는 호남선 완행열차가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이 열차는 원래 8량으로 운행하지만 승객들이 너무 몰려 10량을 더 추가해, 18량으로 운행하기로 결정했다.
출발시각은 10시 50분, 출발시간 35분전부터 개찰을 하기로 했지만
열차 칸을 늘리기 위해 개찰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게이트 앞에는 승객들로 모이기 시작했다
출발 5분전, 개찰이 시작됐고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 모인 개찰구는
무질서한 상태가 되었고
먼저 열차를 탈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사고는 여기서 시작한다. 좁은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은 열차를 타기 위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승객 한명이 앞으로 쓰러지자
사람들은 도미노마냥 밀려 넘어지기 시작했다.
말 그래도 아비규환이다.
이 과정에서 31명이 압사하고 49명이 다치는 큰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고의 원인은 열차 정원을 초과하여 표를 판매한 점에서 시작된다.
당시 호남선 열차의 객차 한 량당 최대 정원은 80명인데
한 량도 200명, 총 3000장을 발급하는 바람에 급하게 열차 칸을 늘리게 되었디.
이 과정에서 개찰구 개방시간이 늦어지게 되었고 이는 사람들을 한번에 모이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안타깝게 사망자가 다수가 부녀자로 밝혀졌는데 이들 대부분이 무거운짐을 들고 있었고
이들을 먼저 승강장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사고가 일어난 이후
역무원 70명, 경찰관 30명이 투입되어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며
다음날 오후에 서울역은 합동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
사망자의 시신은 유가족에게 인계하였고 철도청은 위자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사고 여파로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2300여명의 승객들은 다음날 0시, 새벽2시에 출발하는 임시열차에 탑승하였으며
서울역 역장과 여객주임 두명이 업무상과실치사로 입건되었다.
이후 서울시는 사람들이 자주 몰리는 시설인 동대문운동장, 효창운동장, 장충체육관을 개조하였으며
철도청은 2월 10일부터 운행하는 호남선 열차를 증편하기로 했다.
그리고 4월 1일, 서울역 역장에게는 무죄, 서울역 여객주임은 금고 1년 6개월형을 선고하게 된다.
으